[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上)

by 빅토리아 posted Jun 07, 2015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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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上)
[한겨레신문]  한승헌 | 변호사·전 감사원장

ㆍ사전 각본대로 “정부 전복” 누명… 미·일본선 ‘외교 관계 악화’ 경고장

■ DJ 가슴에 총을 겨누며 ‘갑시다.’

그날 밤의 상황을 김대중(이하 때로 DJ) 자신은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1980년 5월17일) “밤 10시가 넘어서 초인종이 울렸다. 경호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문을 밀치고 쏟아져 들어왔다. 다짜고짜 M16소총 개머리판으로 경호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경호원이 쓰러졌다. 다른 경호원이 그들을 막아서자 역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총마다 검이 꽂혀 있었다. 비서들이 놀라 뛰어나갔다. ‘이 새끼들 까불면 다 죽여버리겠어.’ 40여명의 군인들이 응접실 쪽으로 몰려들었다. 몇몇은 권총을 들고 있었다. 장교 두 명과 사병 대여섯 명이 내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총구보다 칼이 더 섬뜩했다. 장교 하나가 사납게 말했다. ‘합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내가 되물었다. ‘어디요?’ ‘계엄사란 말입니다.’ 나는 윗도리를 가지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나오자 군인들이 양팔을 잡아끌었다. 잡힌 팔을 뿌리쳤다.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며 따라왔다. (중략) 그들은 나를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집에 있던 비서와 경호원들도 연행되었다.”(<김대중 자서전>, 삼인, 2010)

DJ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출생 후 지금까지의 행적을 쓰라고 했다. 그다음엔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하지 않았느냐며 추궁했다. 그러나 그런 혐의는 전혀 근거가 없는 억지였다. 그들은 잠을 재우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질문자도 수시로 바꾸었다. 이런 수법들은 고문보다 더 잔인했다고 DJ는 회고했다. 수사관들은 전남대생 정동년에게 500만원을 주어 반정부운동을 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니 물론 부인했다. 수사관들은 고문이라도 해야겠다면서 DJ의 옷을 벗기고 군복을 입혔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저희끼리 수군거리더니 다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10·26 사태 이후 전두환에 의해서 장악된 최규하 과도정부는 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제주도 포함)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면서 그 이유를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계엄사령부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김종필(공화당 총재) 등 9명을, 사회 혼란조성 및 학생 노조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자로 김대중(정치인) 등 7명을 연행 조사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민주화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각계의 인사들과 ‘동교동’의 비서 및 경호원들이 그날 밤에 남산에 끌려갔으며, 그 후 시차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연달아 계엄사에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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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박건웅


■ 전두환의 야욕에 짓밟힌 ‘서울의 봄’

‘김대중을 체포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를 듣고 격분한 광주시민들은 다음날인 5월18일 거리로 밀려나왔다. 군부 측은 DJ를 체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반드시 광주나 목포 시민들이 궐기할 것을 예측하고 그런 혼란을 의도적으로 조성했던 것으로 DJ는 판단했다. 그런데 사태가 예상외로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김대중, <나의 자서전>, 일본 NHK 취재반 구성, 일본방송출판협회 발행, 1995)

“김대중을 체포하면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군인들이 보여준 대담성은 앞날의 불길한 징조를 예감케 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새로운 드라마가 분명히 시작되었다”라고 독일의 한 일간지는 재빠르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1980년 5월20일자 쥐트도이체 차이퉁) 이처럼 ‘김대중 사형’을 노린 재판놀음은 전두환 군부의 음모대로 서막이 열렸고, 많은 ‘배역’들이 영문도 모르고 ‘징발’되었으며, 나도 그런 조연급의 한 사람으로 스카우트되어 끌려갔다. 참으로 어이없는 전두환식 기습이었다.

그 전 해의 10·26사태로 유신의 본체가 사라진 뒤, 새로운 민주정부를 대망하며 불안과 기대에 숨이 차던 ‘서울의 봄’은 전두환 신군부의 국권 찬탈 야욕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심지어 계엄군은 시민에 대한 무모한 총질도 서슴지 않았다. 광주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직속상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총격전까지 벌인 끝에 체포했다. 그가 김재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였지만, 실인즉 군을 완전 장악하여 자기중심의 신군부 세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의 하극상 범행이었음은 훗날 형사판결로 확인된 바와 같다.

■ ‘남산’ 지하실의 고함과 비명 소리

또한 전두환은 4월 중순에 중앙정보부장서리 직도 겸임하여 민간 정보기관까지 손아귀에 넣어 무불소위의 절대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국권 찬탈에 장애가 되는 인물 내지 세력을 소탕하는 단계에 접어들면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사전 각본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5월31일) 자신이 상임위원장이 되었는데, 이것은 겉으로는 대통령 자문기구였으나 사실상 국회의 기능을 대행하는 국가최고통치기구로 군림했다.

5월17일 그날 밤부터 남산 중정 지하실 이방 저방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끌려온 사람들에게 잠을 안 재우는 것은 관례요, 기본이었다. DJ에 대한 수사관의 말투는 비교적 공손했고, ‘선생님’이란 호칭도 썼다. <김대중 평전>을 쓴 김택근은 “어차피 죽일 대상이었으니 가혹한 고문을 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다.(김택근, <김대중 평전 새벽>, 사계절, 2012)

■ 온갖 고문 당하며 지옥 같은 밤낮을

이 사건으로 붙들려 간 민주인사와 학생들은 온갖 고문을 당하며 지옥 같은 밤낮에 함몰되었다. 부산역에서 체포된 예춘호(전 국회의원)도 남산 지하실에서 모진 수모를 당했다. “(계급이 제법 높은 듯한) 그 놈이 방에 들어서자 첫 마디로 ‘이 새끼가 예춘혼가’하더니, 이어 ‘이 새끼 땅바닥에 앉히지 않고 의자엔 와 앉히나’하고는 의자를 차 밀어붙인 뒤 내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앉혔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그놈은 사정없이 내 얼굴을 구둣발로 찼다.”(예춘호, <민주투사들을 제물로 삼아>-<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음식도 거부했다. 탈진상태에 빠졌다. 수사관들은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만 인정하라고 다그쳤다.

김종완(민주헌정동지회 대표)의 경우도 여간 처참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몇 시간 동안 나를 오직 두들겨 패기만 했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물을 먹여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패기 시작했다. (중략) 그 다음부터 신문이 시작되었다. (중략) 그러한 고문과 악형이 며칠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계속되었다. 앉아 있다가 졸면 그들은 나를 세워놓았다. 세워놓아도 졸음이 쏟아졌다. 서서도 자면 그들은 옆으로 다가와서 갑자기 걷어차거나 벽으로 밀어 쓰러뜨렸고, 펜대 같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이마와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찔렀다. (중략) 나는 죽을 결심을 했다.”(김종완, <군화발에 짓밟힌 민주화의 봄>-<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에 수록)

■ ‘북악파크호텔에서 내란음모’, 각본대로

고문과 허위 자백을 강요당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밤낮으로 이방 저방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승헌, <내가 겪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피고인이 된 변호사>, 범우사, 2013) 가장 터무니없는 억지는 그해 5월12일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이 서울 북악파크호텔 모임에서 내란음모를 했다는 대목이었다. 물론 완강하게 부인하느라 방마다 또 ‘격전’이 벌어지고 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의 수법은 이런 식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시인했단 말이오. 당신 하나만 시인하면 조사가 끝나는데….”

남산 지하실에 갇힌 지 거의 두 달이 될 때까지 우리 일행(?)은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감금 상태였고 가족 접견도 안되었다. 그러던 중, 내란음모죄를 적용한 사람들 중 김대중·문익환·이문영·예춘호·고은·김상현·이신범 등 7명은 7월15일 남한산성 밑에 있는 육군교도소로 실려갔고, 그밖에 조성우·이해찬·이석표·송기원·설훈·심재철·서남동·김종완·한승헌·이해동·김윤식·한완상·유인호·송건호·이호철·이택돈·김녹영 등 17명은 (나중에 알고 보니 하루 먼저), 서울구치소로 실려가 수감되었다. 1975년 봄,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그곳에 수감된 적이 있는 나는 말하자면 ‘재수 없는 재수(再修)’를 하게 되었다. 같은 날, 우리 24명의 사건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계엄사 검찰부에 송치되었다.

■ ‘DJ 사형’ 우려에 미·일의 경고도

계엄사는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 36인에 대한 ‘중간수사결과 발표’(5월22일)에 이어 사건의 군 검찰 송치와 동시에 확대판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골자인즉, 김대중 등이 국민의 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발표문의 분량이 어찌나 방대했든지 서울의 각 방송국이 그 전문을 방송하는 데만 한 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거기엔 ‘5월의 광주사태와 서울의 학생 데모를 김대중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며 죄명도 내란음모·반공법·계엄법 외에 국가보안법 위반까지 얹혀 있어서,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법적용이었다. 

서울발 로이터통신은 김대중이 정치생명뿐 아니라 진짜 목숨까지 빼앗길 위기에 직면했다며 큰 우려를 나타냈다.(1980년 7월4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김대중’이라는 표현에도 계엄 당국의 속셈이 배어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김대중의 일본에서의 정치활동을 위법이라고 한 수사결과에 대해 ‘(1973년 납치사건 관련) 한·일 간의 정치적 결착(決着)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다’며 한국정부에 주의를 환기했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도 한국 군정당국이 만약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권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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