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쟁이의 해탈

by 로산 posted Mar 30, 2011 Likes 0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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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쟁이의 해탈

 

나는 예수쟁이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쟁이입니다.

먹고 사는 것은 다들 하는 것이니까

이건 직업이 아니고 생업입니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예수쟁이인지 생각해 보면

좀 창피합니다.

겉으로는 예수쟁이가 맞은 것 같은데

속으로는 안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예수쟁이인 분들 꽤 계시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럽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어찌되었던 간에 사람들은 날보고 예수쟁이라 합니다

난 그런 말을 듣는 게 즐겁습니다

 

불교에서 돈오돈수란 말이 있는데

성철스님이 “단박에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말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단박에 깨닫고 나니 더 닦을 것이 없더라 하는 말이지요

즉 해탈했다는 말입니다

 

단박에 깨달아 부처가 되건

요즘 젊은 수행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돈오점수를 주장하건

(돈오점수란 “한번 깨친 뒤에도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깨달음 없이는 부처도 되기 힘들고 예수쟁이가 되기도 힘듭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의 깨달음은 얻지도 않았고 이루지도 않았는데

내가 예수께 잡힌바 되어 그 잡힌 것이 뭔지를 알기 위해 잡으러 간다고 합니다

 

깨달으면 뭐하나

금방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을

얻으면 뭐하나

더 좋은 것 찾으려고 버리고 갈 것을

바닷가 자갈밭에서 주운 돌맹이 하나

더 좋은 것 주우려고 다니다가 결국 처음 것 찾으려 간다는데

우리 신앙의 새로운 것 찾기도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새로운 경지를 감각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 얻기 위해서 매일을 정진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것 없이는 결국 원점에서 맴돈다는 말입니다

 

불자들이 단박에 부처가 될 수 없듯이

예수쟁이들도 단박에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언제나 신선한 것

그것은 영혼을 살찌우는 것입니다

 

종교는 이런 경지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요?

교리로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신념으로 깨닫는 것 말입니다

내 종교가 매우 좋다고 남의 종교가 매우 나쁘다는 것은

종교인의 취할 바 태도가 아니지요

그래서 이단논쟁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 보면

그 논쟁 때문에 자기 신앙은 정신 차리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논쟁 자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계급적인 경지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 자주 만듭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배웠던 것 가운데

믿음 성화 영화란 단계별 점진적 경지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는데

70을 넘어선 이 나이에도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허탈해 하기도 합니다

믿음 성화 영화 이런 단계가 바로 종교적 신앙적 계급적 경지입니다

그런 하찮은 것으로 인간을 잣대질 하고 나를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정진을 하듯이

작은 예수가 되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겪으려는 무리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그런 부류가 있고

내 마음 속에도 성화의 단계를 설명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수인양 포장하기도 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의 믿음 즉 예수쟁이란 자만도 가집니다.

 

불교에서는 환생이란 글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세계의 한 부분을 말합니다.

티베트 불교 같은 밀교 형태에서 많이 이용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고행이 유행하던 시절

이런 유의 종교행태도 있었습니다.

비록 환생이란 단어는 부인했지만 고행으로 자신을 환생시키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변화를 받아 천국 시민 되는 것이 또 다른 환생은 아닐까요?

 

우리 생활에서 단번에 깨달음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십자가상의 강도는 단 번에 깨달음을 가졌다고 보는데

그럴까요?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재미있는 사랑 속에 설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게 마음속에 거침이 되어서

해탈을 위해서 인도로 수행을 가다가 중국 어느 동네에서 잠자리를 무덤으로 정한 날 밤

무덤 속에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 해탈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한 해탈의 경지를

디고데모에게 그분은 간단히 설명하십니다.

요 3: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즉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어딘가 좀 상통하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2000년 전 예수는 육은 육일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육이 영이 되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거듭남이란 평생을 통해서 하는 것이라고 화잇은 말하지만

기독교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그 결과인 영생은

점진적인 수행인 돈오점수와 통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그분이 30평생을 통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어느 날 그분의 마음속에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가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를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은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이라기보다 그분의 입혀 주시는 의를 깨닫는 순간이 아닐까요?

 

부처도 못 되면서 해탈의 경지 행사하는 것이나

예수쟁이도 못되면서 거듭남의 경지를 설명하려고 악다구니 쓰는 나를 보면서

어떤 때는 탁발승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지난 번 지리산에서

거나하게 취해서 땡땡이 중 노릇도 재미있어 하는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는 논리가 매우 정다웠습니다

우리는 부처도 못 되면서 예수쟁이는 다 되었다고 떠듭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그분을 아는 척 합니다

남의 종교는 고사하고 나와 같은 교파의 형제들도 이해 못하는

그런 신앙으로 우리는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부터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나는 돈오돈수도 못되는 신앙으로

중생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예수쟁이가 아닌지

상상하면 할수록 가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네 라고 목소리 높여 노래 부르지만

정작 성령은 내 속에 거하지 않는 그런 예수쟁이인지

다시 한 번 두들겨 보는 계기를 삼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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