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동격이신 화잇 선지자

by fallbaram. posted Jun 25, 2015 Likes 0 Replies 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성경을 읽는 눈들이  참으로 한심해지다 못해 이젠 거의 무당수준이라 할까?

그곳서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가만히 보니 그곳의 많은 분들이 여기도 한번씩 마실을 오간다는

흔적이 많기에 여기에다 통탄하는 "양심의 일갈" 하나 이 아침에 토해 보려고 한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서로간의 방향성이 다르다고 줄창 주장하는 나도 인내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우선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

와 요한복음 1장의 "빛이 왔으되" 가 같은 빛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눈을 뜨면

누구와 누구가 동격이냐를 마치 귀신 씨나락 까불어 먹는식의 쉰소리가 얼마나

한심한 이야기인지를 금새 알게 될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경계가 요단강이라는 의미를 깨닫기만 했어도
이렇게 해괴한 방향으로
뻗어가지 않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있기에 오늘은 그 "구"와 "신"사이에 있었던
빛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각각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빛이다.
사람들이 이 두 빛이 같은것이지 않느냐 하고 갑론을박하던 장면이 생각이 난다.

구약은 모든것이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육신의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된
것이고 그 대상이 흙이 . 흙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그 말이 이 의미의 요약이다.
그래서 심심하면 하나님도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것을 후회하시는 척 하시면서 다시 흙으로 돌려 보내고
싶다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이 빛이 그렇기 때문에 "빛이 있으라" 는 말씀으로 이루어 졌고 흙 으로 만들어진
육안으로만 분간이 되는 빛인 것이다. 이 빛-태양으로 비치는 빛 (빛이 있으라 한)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우리는 소경이라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서 다시 빛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새로운 빛은 확연하게 다른 종류의 빛이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빛이다. "빛이 있으라" 는 피동적인 말씀으로 오는것이 아니고 "빛이 왔으되" 라는 능동적으로
오시는 것을 말하고 말씀하시는 그 자체가 오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의 빛이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 첫 다섯절은 이 말씀의 선재성과 새로운 형태로 오시는 말씀 (구약)의 본질이라는 설명으로 시작이 된다.
그리고는 어둠이 "빛을 보지 못하더라"가 아니고 "깨닫지 못하더라" 고 하면서 이 빛은 육신이 분간하는
그런 빛이 아니고 깨달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없이는 깨달 아 질 수 있는 빛이 아니라는 변죽을 울린다.

보는 빛 (처음것)
깨닫는 빛 (두번째의 것)

그 뒤로 이 두번째 빛의 성분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고 그 빛 또는 영광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었던 첫째 아담의 족보에 충만으로 빛으로 그리고
구속의 질서로 오시는 분이시다.
나중에 그 영광의 빛이신 예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 십자가가 아들의 영광이요 동시에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요 17장의 내용이다. " 영광에서 영광으로..."

같은 저자가 그의 책 9장에서는 이런 상황을 "날 때부터 소경" 인 상태의 한 소경을 등장시키면서
율법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무리들에게 너희들이야 말로 날때 부터 소경인 자들이라고 꾸짖으시며
날때부터 소경인 상태를 낫게할 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했다.

결국 그들이 소경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도 맹인인가?" 라는 우문우답을 하게 된다.
"너희가 본다하니 (육안으로 읽는 율법을 말함) 너희죄가 그저 있느니라" 는 현답을 예수는 하시는 것이다.
육안으로 읽고 보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그냥 머무르게 하는 영적 소경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지만
"충만한 은혜"속에서 진정한 용서를 받게 되면 그 용서의 본질이신 예수 "오직 예수"만 보게 된다.

여기에서 실로암 즉 보내심을 받은자에게 눈을 뜨게 된자는 오직 예수를 보게 되고 요한은 그 러한 자를
"보는자 또는 깨닫는 자" 라고 일컫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
육과 영
흙에서 나온 첫째 아담과 하늘에서 내려온 둘째 아담
말씀으로 이룬 (창조주)것과 말씀 자체 로 오신 (구속주)
율법 과 은혜

엘리야와 엘리사
모세와 여호수아
침례요한 (모세와 엘리야의 결합) 과 예수 그리스도
안식일 (해가 지고 다시 해가 질때까지-시간에 얽메인 쉼) 과 그 날의 주인 (해가 짐이 없는-영원한 쉽)
육으로 보는 눈과 영으로 깨닫는 차이에서 오는 서로가 다른 소경됨 .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의 형편인 육신 (첫째 아담안에 있는 현상)이 죽고 다시 오직 생명과 은혜 그리고 진리로만
가득한 영의 본질이 오신 것이다.
그 가운데 요단강 (십자가)이 흐른다.

안식일이라는 껍데기와 그  안식일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분간하는 눈이 그대에게 있느냐?고 물어 보고 싶은 날이다.

고후 3 장에는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고 모세의 제한된 기능에 대해서 사도가 소리를 높인다.
"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 내용과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일치한다.

사사건건 죽이려 달려드는 바리새인들 (율법)의 고발앞에 충만한 은혜이신 그리스도는 "정죄하지 아니하는" 분으로
오신것이다. (요 8장의 요지)

사도는 모세가 맡은 직분이 (죄송하지만)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 이라 하고
모세 다음에 오는 직분과 대조 시킨다.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은 살리는 것이니라"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하고
율법 조문은 죽이는 직분이라하고

이어서 먼저것 (조문으로 된) 은 비록 그것에도 그것의 영광이 있다 하여도 장차 "없어질 것"이라 하고
그 없어지는 시간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 하심같이 십자가에서 없어질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도가 미치고 팔짝 뛰고싶은 일이란 지금도 그 없어진 영광에 취해서
그것에 목을 메는 바보의 행진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이시니 주의 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광에서 광에 이르니 곧 주의 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육에 준 기별 (모세의 직분-율법)은 육을 묶고 사망으로 끌고 가지만
영에 준 기별 (예수의 십자가)은 영을 묶어서 영생으로 끌고 간다는

성경 전체의 메카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직도 모세의 영광에 취하여 저리도 비틀거리고
화잇여사도 모세라고 동격으로 끌어 올린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장차 없어질-그리스도가 오실때에
수건을 뒤집어 쓴-영의 십자가를 분간하지 못하는 육신의 한계
죽음의 직분

이 역할을 십자가 보다 이천년 뒤늦게 오신 기별자가
동격이라는 말인가?

예언의 신을 읽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귀신들린자들이
오직 성경을 읽고 그 성경이 해석하는 성령의 역사위에 멍석 깔고
무슨 탈춤을 그리 하실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Ellen G Whitian? 인가?

그분의 글 제목만 여기에 올린다.


조재경님의 글
경은  White을  모세와  동격( 同格 ) 선지자라  하신다
(도데체 무슨 근거로)

( 1 )  부활할 자 대표 모세와  살아 승천할 자 대표 엘리야


( 2 )  율법 대표 모세와  선지자 대표 엘리야



( 3 )  정경  선지자 대표  모세와   비정경 산지자  대표 엘리야

( 4 )  엘리야 = 침례 요한 = White


*  그런데 침례 요한도 엘리야이다( 마17:12,13,  11:10,11,  눅1:15~17 )

*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 에서  엘리야를 빼고 대신 침례 요한을 넣어도 된다

모세와  엘리야 ---> 모세와 침례 요한

* 그런데 말세 재림 전 선지자 White도 엘리야이다 (말4:5,6 )

그렇다면 침례 요한을 빼고 대신 White을 넣어도 된다


모세와 침례 요한  --> 모세와 White


* 그러므로 성경은 White모세 동격으로 말씀하신다



*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White은 침례 요한과 똑같이 선지자보다 나은 사자라고하시었다

* 우리 성도들의 에언의신에 대한 경각심을 높히기 위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


성경은  White을  모세와  동격( 同格 ) 선지자라  하신다


fallbaram의 질문.


그러하다면 White 도 고후 3장에서 말한 모세처럼

죽음의 직분을 맡으신 분이라는 말인가?

그래야 하지 않는가?


삼단논법이 이렇게 쓰여질줄은 꿈에도 몰랐다.


1단

엘리야 = 침례 요한 = White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 에서  엘리야를 빼고 대신 침례 요한을 넣어도 된다


2단

모세와 침례 요한  --> 모세와 White


그렇다면 침례 요한을 빼고 대신 White을 넣어도 된다


3단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White은 침례 요한과 똑같이 선지자보다 나은 사자라고하시었다 (이상)



다시 가을바람의 탄식


조금있어면 선지자 보다 나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화잇=그리스도 가 될날이 찰나에 깔려 있구나.


더 한심한 일은 내노라 하는 그곳에 진치고 계신 성경의 대가들이 이 삼단논법앞에서 침묵하고 있는것이다.

무슨말인지 모르던지

아니면 쇠뇌를 그렇게 받았던지

아니면 협박을 당하고 있던지

아니면 화잇에 대한 어떤 칭송도 너무 이쁘게 보이던지


차라리 그들이 집창촌처럼 여기는 민초에선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는데.

한둘의 거시기만 빼고는.....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