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과소평가 되고 동시에 가장 과대평가된 이 존재

by fallbaram. posted Jun 29, 2015 Likes 0 Replie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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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 사탄! 사탄!

이 존재만 없었더라면 우린 지금 어디에 있게 되는가?

여전히 선악과 아래 있게 될것이다.


우리의 원조요 어미인 하와가 하나님의 보좌에서 쫒겨난 반역자인 사탄을 만나서 대화 하는 과정이

혹시 실제적 세팅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줄거리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상당히 인간적이고 또 일상적이다.

"각 시대의 대쟁투" 처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번의 대화가 벌어지는 장면이 욥기에서 기록한 하나님의 보좌에서다.

하나님의 아들들하고 동등한 지위로 참석한듯한 사탄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이 민초에서 오고가는 대화보다 더 심오하거나 복잡하지도 않다.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 (하나님)이 물절적으로 욥을 지나치게 도와주었기 때문에 나타난 충성" 일 뿐이라는 불평을 터뜨린다.

그 의로움이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이라는 것으로 몰고 간다.


"절대적 의로움" 이나 "절대적 진리" 는 상대적인 조건이 무너진다 해도 여전히 나타나야 하는 것들이다.

진정한 감사 내지는 절대적 감사가 "외양간의 소가 없어도" 감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

그것도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를 꼭 물어야 할 대상이다.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곧 시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대적이라는 것과 만점이라는 것과 혼동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행동들은 시험을 거쳐서 증명이 되어야 한다.


그 시험을 위해서 선택이 된 존재가 사탄이다.

마태복음 4장에는 이렇게 사탄을 묘사한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시험하는 장면이다.

시험하는 자의 시험속에 시험이 들어 있디.

자신속에 존재하는 신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아버지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이

자신을 나타내는 일이다.




이 시험하는 자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하와에게

욥에게

그리고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에게 시험을 던지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 시험의 골자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일을 부추기는 일이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사십일이라는 광야의 금식을 끝내는 시간에 나타난 사단의 시험이다.


죄의 기원을 이 사단이라는 존재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을 전제로 가정하자면

죄란

"이 시험에 빠지는 것" 이 죄가 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를 다른말로 하면

"우리를 죄를 짓게 하지 마옵시고" 로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험이 우리 몸속에 항시 모든면에서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시험이 바깥에서 필요할 때 오는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중에 태어났다 함은

우리가 시험중에 태어났다 함이다.


오늘도 시험하는 자가 내 속에서

"니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고 속삭인다.

"니가 만일 남은 무리라면?" 하고 속삭인다.

"니가 만일 인침을 당할 그 사람들이라면?" 하고 부추긴다.


그 시험에 넘어가서 스스로 의인이 되어 버린 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는 고백은 이 시험에서 내가 스스로 하고싶은 의지를

날마다 죽이는 것이지 죄의 모양을 버리는 그런 값싼 경험이 아닌듯이 보여진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행위의 주인이나 주체가

지신일 수 있다.


하나님같이 되고싶은 우리 신앙인들의 염원속에 사단은 언제나 이런 질문으로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 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 십자가를 지도록 도와준

협조자이다. 이 시험하는 자를 하나님이 다시는 시험이 필요 없이 절대적 진리가

되었을 때 버릴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 절대적 진리가 증명이 된 시간이요 장소이므로\

"이 세상 임금-즉 시험하는자" 가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단은 요 아래에서 혁님이 말하듯이 흉칙한 짐승의 모습으로 악마처럼 나타나는 존재도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그 자리에 얼굴도 없이 나타나는 묘한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세엑쉬한 남의 여자와 한몸이 되어버리는 그런 죄는 쉽게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돈을 훔치거나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십계명도 어쩌면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하는 자가 진리의 시발점을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사알짝 옮겨놓거나

여기서 이런말 저기서 저런말로 거룩하게 짜깁기 해 놓으면 그런 시험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다. 요즘에 가짜를 만드는 인간의 실력도 구분을 잘 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는" 시험하는 자의 시험이 얼마나 교묘하고 진짜에 가까우랴 하고

한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내가 올리고 있는 이 글들도

혁님의 그 아빕월도

예님의 그 영감의 말씀들도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8)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그 시험을 이기신 한 분이다.

그가 도우시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분의 전적인 도움없이 서야하는 "고독한 시간"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기별은

어디에서 오는 기별인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

그리고 시험하는 자의 실체도 바로 알자!!!


시험하는자가

눈 치켜들고 쌍심지에 불 지피고 바닷가 모래위에 서지 않는다.

그는 지금 나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매순간 시험하려고

또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다.


일곱번 넘어져도 예수와 함께 여덟번째 일어나는 자가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다.


무슨 진리랍시고 가슴에 포장해서 금이야 옥이야 싸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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