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불꽃놀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park 에서 이른 해거름에 집사람하고 교우 한분이랑 한시간 정도
walking 을 하다가 불꽃놀이를 보고 집으로 가자고 하는 내 제안을 "아직 해지기를 기다리려면
한시간 반" 이라는 집사람의 협박(?)에 슬거머리 꼬리를 내리고 집으로 왔다가
창문틈으로 솟아오르는 불꽃들을 보려고 기다리는 사이에 그만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서 민초의 창을 열어보니
"열린 마음" 이라는 제목부터 입맛을 당기는 글 하나가 거기 있었다.
새벽이라 집중력이 다소 좋은탓에
한자 씩
한줄 씩
한단락 씩
읽어 갔다.
예기치 않은 침입자에게
여인이 가슴에 숨겨둔 애장도를 꺼내어 상대의 가슴을 콕콕 찔러대는
그리고
찌를때마다 찟겨지는 붉은것들이 핏불 (D)의 뺨으로 흘러내리고
며칠전 어느누가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하고 올렸던 그 남자들의
항문에서도 흘러 내리는...
며칠전까지도 백색의 꽃이었던
야생화의 마음에도 그런것이 흘러 내리고 있어 보인다.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 갔을때에
이스라엘은
에발산과 그리심산이라고 하는 측복의 산과 저주의 산을 좌우로 끼고
들어가는 광경이 나온다.
우리는 날마다 축복의 생각과 저주의 생각 사이를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더더욱 믿는자들이 그러하다.
더더더욱 재림교인들이 그러하다.
고후 13장에는 모세는 그 저주의 생각 (율법)의 직분을 맡은자이고
예수는 그 축복의 생각의 직분을 맡은자로 소개한다.
요 8장에는 간음중에 붙들린 여인 (나는 실제적인 상황이라고 보기 보다는
매우 비유적 상황이라고 보고 있는) 에게 자칭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이름하는
무리들이 돌 (죽음)의 심판을 독촉하지만 예수는 정죄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도 말아야 할 것을 주문하셨다.
고후 13장을 드라마로 연출한것이 요한복음 8장이다.
돌로 죽음의 심판을 집행 했더라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울타리 보다 은혜의 울타리가 더 높고 생명적이라는 말이다.
글쓴이가
여기 저기에 흩어 놓았던 내 산만했던
표현들의 장작들을 쌓아놓고 은혜의 모닥불을 지피는듯 한
찡한 느낌이 드는 새벽이
울면서 오고 있다.
민초에서 글을 쓴 결과로 동생을 하나 얻었는데
그가 요즘 "형님 보세요. 진주님같은 은혜중심의 복음을
붙들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라고 헤헤 거렸는데
나도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글을 써서 보냈다.
동생님
어찌보면
찬송가 한절보다 못한 신학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 을 이루려고
다섯 행각 (모세의 숫자) 아래서 삼십팔년이라는 광야의 날들을
서지도 못하고 들어누워 있는 병신 들의 활동무대
그 와중에서 동생과 나는 이 경이로운 빛을 바라보고
다만 듣고 일어서기만 하면 약속이 된
"오늘 너와 내가 함께 서 있는 낙원"의 약속을 따라
이 아침이 기쁘지 아니한가?
정말 기쁘지 아니한가?
미치도록 고마운 날이 아닌가?
새벽이 오고있다
오십줄의 한맺힌 여인의 울음
앞세우고
민초동산을 거닐다가 가을바람님의 은혜의 고리에 걸렸을 뿐입니다. 이제 혼자 걷지 않을려고 합니다.
열어주지않는 재림교회의 문턱에서 많이 외로왔거든요. "닫힌마음"이었으나 "열린마음"이 되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