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라는 글을 향해 딱 세사람의 반응이 있었다.
한분은 댓글로 한분은 이멜로 또 한분은 전화통화로...
언제나 두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세사람은 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음을 표현했다.
한분은 격랑과도 같았던 "사랑 이야기" 한번이면 족하다고 했고
한분은 다시 돌아가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땐 참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의 표현이고
또 한분은 지금이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경을 뚫어지게 읽어 보면
하나님은 흙에서 빚어낸 아담의 육신이 썩거나 죽기를 원하시는것 같다.
선악과의 이야기
침례의 이야기
그리고 십자가의 이야기는 죽지 아니하면 다시 영원한것 (하늘의 것)으로
살아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것을 사도는 썩을것이 먼저 있고 다음에 썩지 아니할 것이 오는것으로
이해했다.
성경을 결론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병주고 약주신 분이시다. 사망도 영생도 그분의 청사진이다.
에덴 동산의 순서는 선악과라는 병을 먼저 두시고
나중에 십자가 (생명과) 라는 약을 처방하셨다.
둘다 태초부터 세우신 계획이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흙으로)
천사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려고
하나님의 아들은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그 목숨의 값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 복음이다.
이것 하나 깨닫는 것으로도 나는 다시 스물 다섯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옆동네에서는 왜 그리 살아서 구원받으려고 야단인지 모르겠다.
이 죄악된 육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구원은 결코 없어 보인다.
이 육신을 당신의 영으로 바꾸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린 하늘로 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도는 날마다 죽기를 희망했다.
그래야 날마다 사는 경험이 된다.
"물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기억하라" 고 세천사가 부르짖는
기별속에는 영원한 복음이 창조의 패턴속에 들어가 있다는 암시이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해진 안식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니안에
니가 내안에
이보다 더 안락하고 쉼을 주는 기별이 없다.
그러나
"내가 니안에"라는 공식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그리 될 수 있는 일이고
"니가 내안에" 라는 공식에는 그 아들을 향하여 니가 죽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둘다 성령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의 간증을 따라
이 하루도 죽음의 제단에 나를 올려 놓아 본다.
다 뚫어보고 있는 글에
댓글 달 마음도 없고
그냥 죽는 시늉이나 하고 살렵니다
나일 더 먹어봐요 죽는다 하고 죽을 병 걸리면
항암제 먼저 먹을 사람이 나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