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에너지원 보다는 에너지로 바뀐것을 보아야 완성이라고 언제나 굳게 믿는 계명을님의
신조를 알고 있긴 했지만
"십자가를 밟던, 십자가를 지던
이미 그것은 지나간 과거요 역사일 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있는 십자가의 영원성을 기초부터 흔드는 쇼킹한 발언이다.
그리고 하시는 말이
그것들을 밟고 넘어서라!
십자가 에 머물러 있으면 그대는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에 머물러 있으면 그대는 예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엘렌지 화잇에 머물러 있으면 잘못 읽은 것이다!
마치 내가 예전에 살짝 미쳐서 좋아했던 인도산 라즈니쉬의 철학을 보는듯하고
류시화의 시 한편 땡기는 기분이다
그런데
십자가! So What!
예수! So What!
엘렌지 화잇! So What!
그것들을 밟고 넘어서라!
님에게는
예수와 엘렌지 화잇은 언제나 동격으로 세뇌된 바벨론이고 그래서
한통속 같이 "그것들이" 된 것이다
엘렌지 화잇은 넘어설 수 있다해도
그러나 예수와 십자가는 넘어서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이다
반대로 엘렌지 화잇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행함에 맞추다 보니
성경과 예신이 짬뽕이 되고 또 예수와 할머니가 동격이 되고 마는
지경이 오지 않았는가?
믿음도 "바라는것의 실상" 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 라 한것처럼 실상과 증거가 나타나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역사가 아니고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일 뿐이다.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사도의 외침도 그런 의미에서다.
계명을님의 역사에서 흘러내리는 그 눈물은
복음의 역사인가?
아님
믿는자들에게 쏘아대는 질타와 통한의 눈물인가?
질타와 통한이라면 그대 생애속에서 그대의 이론처럼 콸콸 쏟아지는 현재의 역사 개인의 역사
그것 한조각 올리시고 부디 눈물울 거두시오.
"뜨거운 물에 데었더니"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왜 없겠는가?
듣고 잡다.
진짜로
저의 집엔 무화과 나무 두 그루가 있어요.
요즘 날마다 열매를 따는데 가족들 한끼 식사로는 충분해요.
어떤 날은 익은 열매를 다 땄다고 생각하고 돌아서 올려다 보면 군데군데
잎사귀에 가려진 열매가 감쪽같이 숨어서 달려 있기도 하죠.
계명을님의 so what을 예루살렘성 무화과나무를 향한 애원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잎사귀 안에 숨겨진 열매를 찾지 못한 배고픈 짜증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미지근한물 속에서 서서히 익혀져가는 개구리를 향해 비웃는 조롱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 마음이 간절해 so what이라고 밀치면 I'm sorry하며 넘어져도 할말없는 죄인이지만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넘어지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화잇이 아닌 창조주 예수로부터 온 믿음의 지식과 지각이
내 속에 가려져, 숨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글 전부, 뜨거운불에 데여 팔딱거리는 몸짓인데
이 불 붙도록 계명을님에게도 기름 한바가지 뒤집어씌우면 되지 않을까요?
함께 팔딱거리며 뛰다보면 얼떨결에 원하시는 곳까지 넘어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