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앞에서 나가 떨어져 객사한 홉니와 비느하스

by 진주 posted Jul 09, 2015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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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여호와 앞에 서야 한다 (출34:23).

선민인 레위출신의 엘가나가  일년에 한번씩만 그의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화목제를 드리기위해  실로에 있는  성전을 찾았다(삼상 1:3)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소홀히 여김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그 당시의 영적태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사는 불경한 제사장에 의해 여전히 멸시를 받으며 진행되었지만 삼상 3:1에 기록되었듯이

"여호와의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었다.


90세 나이 만큼이나 오래도록 하나님을 대변해 왔으나 

인간, 그 한계에 다다르니  율법으로 시작해 육으로 마치는 엘리의 영적 아둔함이 

비계덩어리처럼 그 아들들의 삶과 함께 엉켜있는 성경구절를  읽자면 

사망의 기운이 느껴진다.


블레셋의 전쟁에서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결과가 패전이었다.

거기다 왕 노릇하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객사했다.

이 사건을 두고 설교자들은 

아버지가 아들들을 잘못 가르쳤다거나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을 가진다. 그럴수도 있다.

그럴수도 있는 것이 그들은 불량하게 성장했고  물욕도 많았고 또 어느 안식교인이 그리도 싫어하는

육식을 엄청나게 즐기면서 제사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미달이었다.(삼상2:12~16).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에 소홀한 것에 대하여 엘리가의  멸족을 결심하셨다면

엘가나가의 운명도 비슷해야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일관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서 말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엘가나의 제사 태도가  비유로 치자면, 

한달에 네 다섯번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규정을 한달에 한번정도 지킨 꼴인데 말이다.

안식일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있을수 없는 망령된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 씨를 통해 사무엘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율법을  정하시고도 스스로 율법을 깨버리신다. 

누구말에 의하면 율법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였음에도 말이다..

삼상 2장 30절엔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을 하셨는데도 

안되겠다 싶으시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규칙을 뒤집어 버리신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가 섬기는 전능자가 변덕장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이  엘리처럼 섬기면 같은 죽음이 뒤따른다.


엘리는, 엘리의 몰락은 바로 회개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그는 회개를 몰랐고 아들들에게 회개를 가르치지 않았고 백성에게 회개를 선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주 든든한 언약궤가 있었고. 이방에게 없는 구원의 독특한 증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언약궤가 가는 곳에 축복이 있었고 저주가 있었으므로 그 보다 더 든든한 방패가 없었으니 "천하무적"이었다. 


바락의 실수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드보라를 전쟁터에 동행시킨것처럼 (삿 4:11~ ) 

엘리의 죄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쟁터에 내 몰았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쩌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 할 수도 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마음대로 옮겨 다니는 자들이 있다.


아기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엘리의 죄를 지적해 주셨다.

삼상 3장 13절에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엘리는 그 자신의 죄악을 이미 알고 있었고 사무엘을 통해 재차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언약궤가 동원되기 전에는  블레셋에 의해 사천명이 죽었고 언약궤가 동원된 뒤에는 삼만명이 몰살되었다.

언약궤만 있으면 구원 받을 줄 알았던 그의 지식과 믿음이 이방의 칼부림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비참한 사건으로 기록된 이 전쟁에서,  언약궤는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같이,   나의 지식의 전쟁에 언약궤가 동원되기도 하며

우리만의 구원의 전쟁에 언약궤를  이동 시키는  엘리같은 자들이 있다.

언약궤 안에만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고  하나님마저 가둬버리는 자칭 십사만사천이 있다.

성령이 역사할때와 성령이 쉬셔야 할 기간도 정해주는 ,  하나님보다 높은 이도 있다.

그러나 언약궤의 보호하심, 즉 예수와   상관없는 자들에게는  

가는 곳마다  법궤의 저주로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은 십계명에만 계시지 않는다. 

그에겐  삼십계명 아니 삼천계명이 있다. 십자가가 계명규칙을  뒤집어 버렸다. 

하나님이 안식일교회만  구원의 인 박지 않으신다. 

해와 달을 지금이라도  치워 버리면 일요일도 없고 토요일도 없다.

단 하루를 가지고도 영원의 시간을 끌어 가실 수 있다.

하나님이 법궤안에만 계시지 않는 것처럼  예배의 영광을 안식일에만 취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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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징적인 언약궤를 미신적으로 숭배했던 이스라엘과 

율법을  진리로 착각하며 숭배하는 또 다른 몰락할  이스라엘...

엘리는 언약궤를 내어주기 전에 그가 지적받은 죄악을 먼저 회개했어야 했다.

십자가를 모르니 회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자기 의자"(삼상 4:13,18)를 치우고 엎드려 울며 이스라엘의 죄를 고하며 제사장의 사명을 다했어야 했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이다.


언약궤가 결국 십자가로 오셨고   전쟁에서 승리하셨고 "자기 보좌"로 앉으셨다. .

자기 지식이 자기 최면이 되어버린 우리 중의 어떤 엘리가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것을 믿는다.   아니 믿는것 같이  알고있다.

그러나 그들이 언약궤 앞에서 나가 떨어져 죽게 될  것은 

언약궤를 심령 한가운데 모셔야 함에도 마음대로  그들이 원하는 장소로 옮긴 죄 때문이다. 


대변인 아기 사무엘의 지적에도 회개하지 않은 우리 가운데의 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바쳐 보여주신  십자가만이 할 수 있는,  구원의 법궤를  

자신들의 전쟁터로 마음대로들 가지고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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