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하주민님의 성서적인 고찰은 십년전에 내 자신이 둘러 빠져있던 그런
방향이랑 너무나 흡사하여 아직도 가슴을 파고 드는 아름다운 내용들이다.
오년전 까지도 그 내용과 동일 선상에 내 믿음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로마서를 해석한 서너박스의 책들도 다 갖다 버리고 이제는
성경만 읽고 지낸다.
하주민님이 결론부분에 박아넣은 주옥같은 말씀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의를 모든 믿는 자에게 입혀 주시고
그렇게 하여 “율법의 요구”가 그들의 생애에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부분은 계명을님하고 같은 연장선이며 다만 그분보다 훨씬 논리적인 전개이다.
만약에 율법의 요구가 그들의 생애에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셨다면
예수는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였듯이
마침은 마침이요 충만은 충만이다.
그 충만이 내 영에 비치는 순간에 나는 충만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몰라야" 하는 것이다.
그 충만이 그들의 생애에 나타난 그것을 거두러 오시는가
아니면
그 충만이 그들의 믿음에 비추어져 있는 그것을 거두러 오시는가?
그 충만(기름)을 가지고도 조는 자들 (비추지 못하는 자들)
을 깨우러 오시는 신랑이 당신의 신랑인가?
아니면 나만의 신랑인가?
바라보므로
믿음으로
이미 마침이 되는 그의 백성에게 지성소와 조사심판은 끊임없이 "그들의 생애"에
예수를 닮은 다른 시작과 빛의 열매를 내어놓으라고 욱박지른다.
그래서 시골로 가야하고 또 채식만 하고 살아야 하고...
우리의 깊은곳에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의심이란 뱀이 있다.
그 뱀이 언제나 묻는다.
"정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느냐?" 고
하와는 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믿음 플러스" 가 있어야 한다고.
Faith+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만 먹으면 너는 끝장이다!"
로마서도 그렇게 시작한다.
"이것만 바라보면 너는 마침이다"
그 마침에 들어감이 안식이다.
그 안식의 주인은 십자가다.
다만 "당신은 이 안식에 들어 갔소?"
라고 묻지 말자.
각자의 몫이고 또 성령의 역사이니까.
이렇게 시간속에서 변하고 있는 내 신학적 방향이 또 다시 변할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요즘에 "어린양의 피에 날마다 옷을 빤다" 는 의미를 놓고 심각한 생각들 많이 하고 있다.
내 잘못을 아니 내가 저지른 죄를 빤다는 말인가?
아님 그 피에 묻어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나의 의심을 빠는 것인가? 하는.
주체가 나의 죄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피인가의 방향 말이다.
후자가 더 좋아 보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부르는 대부분의 찬미가들을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찬미의 내용은 동으로 가고 우리의 신학과 예배는 서쪽으로 가는것이 마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