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수도 몰라보고 지나간 안식일

by fallbaram posted Jul 19, 2015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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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와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뜻밖의 선교사"
라는 과정공부가 만들어 지고 나아만에게 자신의 나라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소개한 계집종이 선교사로
소개되는 날이다.

이방의 고관에게 주저없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선지자를 소개하는 일
우리에게도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을 언제나 주저없이 누구에게든지 소개하는 일
뭐 그렇게 갖다 붙이려고 하는 것인지

선교사는 선지자를 소개하는 역할인가
아니면 복음 (예수)을 전하는 사명의 사람들인가

선지자는 또 누구인가
이적을 행하고 기별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가
아니다
성경적 선지자란 예수의 것을 미리 가리키고 또
그 역할을 맛보게 한 사람들이다


엘리사의 이적들은 예수의 공생애 속에서
나타나는 이적과 기능을 미리 보여준 것들이다. 
요단 강을 갈라지게 하고 거기서 갑절의 영감을 받았던 엘리사는
훗날에 요단강에서 신약과 구약의 인물이 침례라는 예식으로 갈라서는
예표이기도 하고 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던 그 장면의 예언이었다.

쓴물을 단물로 정화시킨 이적은
율법의 쓰디쓴 요구에서 내가 주는 이 물-보혈의 피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고
복음을 소개하는 표상이다.


과부의 기름통에 기름이 끊이지 않게 하신것도 여자로 상징하는 교회에게 성령의 임재를
축복하는 예수의 기능과 같은 의미이다.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던 엘리사처럼 예수도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아나게 했고
적은 양식으로 1백 명을 먹이던 엘리사처럼 예수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도록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무덤에 있는 앙상한 뼈에 부딪힌 시체가 살아나는 부활의 메세지는
 "나의 하나님은 구원" 이라는 이름처럼 예수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뜬금없이 이방의 문등이 (죄의 상징)가 찾아온다.
요한복음 9장에서 봉사의 눈에 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보내심을 받은자)에 가서
씻으라 하시던 예수처럼
씻음의 상징인 요단강에 가서 씻음을 받으라고 한 기별은 복음이다.

눈으로 보기엔 더럽고 우중충한 강물이지만 나의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일곱번 (완전한 순종) 몸을 담갔더니 그 몸이 달라졌다.
흐르는 물의 의미를 가진 요단강의 씻음은 십자가의 씻음을 가장 잘 예표한 지형적 기능이다.
일곱번의 완전한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의 혼이 달라지는 복음이다.

그래서 나아만의 이름이 즐겁다는 뜻인 것이다.
즐거운 소식을 접한 최초의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흙 (약속의 땅)을 퍼서 은금보화를 실어 왔던
그 수레에 약속이라는 복음을 실어 가지만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그 은금보화를 원하다가
끝내는 나아만의 문둥병을 대신 짋어 진다.

예수 (요단강)의 씻음을 입은자가 곧 선교사이다.
계집아이가 아니다.

낫놓고 기억자도 모른다 했던가
이리도 아름다운 예수이야기를 놓고 우린 계집아이의 심부름 때문에 이스라엘의 체면이 서고
다시 선지자가 높임을 받는 그런 유치한 공부밖에 할 수 없었는가?

이 교회의 새벽성서학교의 석학들은 이 과정공부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이 성경(구약)을 상고하지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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