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선악과

by fallbaram posted Aug 03, 2015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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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를 보면

인간은 그렇게 숫자적인 제한성 안에서 재능이 주어지거나 믿음이 주어지거나

또 헌신의 영역이 정하여 진다.

그 재능과 믿음을 주시고 주관하는 분은 완전하거나 무제한이지 못하면 제한적

숫자를 누를 수 없다.

두 달란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에 다섯 달란트를 담을 수도 없고 담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에 시작하는 "빛" 이라던가 "생명" 이라던가 "은혜" 라던가 "진리" 라던가 또는 "충만" 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이요 또 하나님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전하고 있는 기별은 사람에게는

그런것이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빛이 아니고

우리에겐 은혜란 없으며

우리의 것은 비진리이며

우리의 삶은 충만하지 못한것을 말함이다.


마치 죽어 있는 나사로에게 "그가 잠잔다" 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죽어 있는 그를 "일어나라" 고 하실분도 그분 한분이시다.


죽어있는 상태를 산자의 상태로 돌리시고

불완전한 상태의 인간을 완전하다고 칭하시며

비진리인 우리를 진리로 인도 하시며

충만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각자의 나름에서 충만하게 살도록 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이런 분을 믿어서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것과

우리가 이런 분을 알아서 완전한 행함에 이르는것의 큰 차이를 나는 보게 된다.


그분을 믿어서 나의 그릇이 채워지고

나의 어두운 그릇에 빛이 가득하고

죽어있는 나의 그릇에 파릇파릇한 생명이 감돌며

인간의 생각으로 가득한 그릇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하게 하실 분을

기다리고

바라보고

믿는 것과


감히 하나님의 그 큰것 (진리, 생명,은혜와 빛)을 마치 내 그릇속에 다 완전하게 담은것처럼 여기고

그래야 하늘에 적합한 것처럼 몰아가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던 완전한 기별을 이제사 내 그릇에서 완전하게 내 비친다는 은유적

기별을 전하는 이들이 이 민초에 더러 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완전이란 단어에 미쳐버리는 존재인가?

그 완전은 언제나 완전하신 분의 완전한 제사에서 존재하지 않고

이제사 깨닫는 자신의 그릇에서 완전이 생겨날까?


선악과는 죽지 않았다,

뱀이 죽지 않은것처럼.


완전이라는 것

그것 따 먹으면 죽는 다니까!!!


칭의가 모자라고 배가 고파서

그 완전을 따 먹게 되면 틀림없이 죽는다니까!!!


완전한 그릇에 불완전한것을 담으면 살고

불완전한 그릇에 완전을 담으면  죽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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