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거짓말을 또?

by 노 동자 posted Aug 04,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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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의 합리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전제하에서 ○○해고제 도입은 바람직하다. … ○○해고제는 그간 대법원에서 일관되게 나오던 판례를 법제화한 것에 불과할 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일반해고 도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드는 논리와 많이 닮아 있는 위 얘기는 어디서 누가 한 말일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19년 전인 1996년 12월5일, 노동관계법 토론회에서 당시 김영배 경총 상무가 ‘정리해고제’ 도입 필요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꼭 3주 뒤인 12월26일, 김영삼 정권은 노동법 개악을 새벽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자, 그렇다면 19년 전에 도입된 정리해고는 과연 대법원 판례를 단순히 법제화한 것에 불과했는가? 해고의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 억울한 노동자들을 구제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안다. 정리해고라는 말도 잘 몰랐던 기업들조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정리해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 한마디에, 희망퇴직·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떠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19년 사이 김영배 상무는 경총의 상근 부회장으로 승진했지만, 수백만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사이 대법원 판례는 더 보수화되어 2002년에는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도 정당하다고 판시했고, 지난해 쌍용차 대법원 판결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며 칼자루를 기업에 완전히 쥐여주고 말았다. 정리해고 법제화 이후 해고의 기준은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해왔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1996년 정리해고 도입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한국 사회는 ‘우울한 격변’을 겪지 않았던가. 평생직장이란 단어는 잊혀졌고, 비정규직·저임금·실업과 고용불안이 사회 전반을 휘감게 된다.

19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똑같은 거짓말을 듣는다. “취업규칙 관련 대법원 판례를 가이드라인으로 정하자는 것일 뿐인데 왜 호들갑이냐, 해고 기준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도 유리한 것 아니냐, 오히려 늘어가는 해고 관련 법적 분쟁을 줄여줄 것이다.”

이제 사기 좀 그만 치자. 이런 내용이 제도화되면 ‘일반해고’라는 말도 잘 몰랐던 사업장에서 직무평가를 핑계로 인력감축에 나설 게 분명하다. 그냥 쫓겨날래, 한 푼이라도 챙겨서 나갈래 이런 공포를 조장해 희망퇴직·명예퇴직도 성행할 것이다. 법적 분쟁이 줄어들기는커녕 일반해고 관련 소송은 늘어날 것이고, 법원에서 보수적인 판례 하나만 나와도 해고 기준을 더 완화하려고 덤빌 것이다.

취업규칙 변경 역시 임금피크제만을 노린 것이 아니다. 더 낮은 임금체계, 특히 직무·성과급과 연봉제 도입으로 연공급·호봉제라는 단어를 잊게 만드는 수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라는 대법원 판례 문구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또다시 한국 사회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가증스럽게도 정부는 이 모든 것이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에코 세대’라 불리는 현재의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겪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아픔을 함께 경험했다. 대법원 판례를 제도화하는 것일 뿐이며 해고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에코(메아리)’처럼 또다시 듣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와 에코 세대를 이간질하려는 농간에 맞서 분노의 화살은 다른 쪽을 향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장·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 그때보다 수십, 수백 배의 이윤을 벌면서도 호시탐탐 해고와 비정규직을 늘리려는 자들 말이다. 임금피크제가 아니라 이윤피크제를 실시하라고, 그동안 벌어먹은 수백 조원의 이윤에 세금을 매기라고, 그 돈으로 공공부문부터 청년들에게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라고 말이다


경향신문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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