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by 백근철 posted Aug 11, 2015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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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로버트 크래프트가 함게 나운 이야기를 정성스레 묶은 대화록을 보면 특히 눈길이 가는 대목이 하나 등장한다. 노老 작곡가는 1920년에 발표한 발레곡 <풀치넬라>에 대해 언급하며 페르골레시를 비롯한 18세기 음악가들의 작품을 편곡해 사용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을 회상한다.

원곡을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조차 없던 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고전은 우리 모두의 것이니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그런 자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대들은 고전을 '존중'할지 모르나 나는 고전을 '사랑'한다고.

  스트라빈스키의 창조력과 천재성의 핵심은 그에게 모델을 제공한 대상을 깊이 흠모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손을 댄 모델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그의 것이 되어버렸다.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짙은 민족주의적 영향도 그러했고, 생이 저물기 직전에야 눈을 뜬 안톤 베베른의 고도로 정제된 음악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골탈태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싸구려 주제도, 혹은 지나치게 기묘한 주제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그의 영감의 원천 또한 광범위했다. 프로코피에프는 스트라빈스키의 <뮤즈를 거느린 아폴로>를 듣고 나서 다른 발레 작곡가들의 악상을 좀도둑질해서 이어붙인 수치스러운 사례라 평가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구노나 들리브처럼 도무지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작곡가마저도 끝없이 존경했다. 헝가리와 그리스의 민속 음악 뮤직홀 엔터테이너 리틀 티치의 익살맞은 행동, 재즈 뮤지션 쇼티 로저스의 트럼펫 연주까지, 스트라빈스키의 창조적 방앗간은 이 모든 재료를 좋은 알곡을 받아들여 찧어냈다.

  여든 고령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국 러시아를 방문한 거장을 환영하며 외경심에 휩싸인 여러 작곡가들이 참으로 적절히 지적하기도 했지만, 스트라빈스키와 견줄 만한 인물은 피카소가 유일하다. 20세기의 대격변을 두루 경험하고 이를 태연히 예술에 반영했다는 점에서-비록 언제나 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그런 것은 아니지만-또한 각자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적이다. <스트라빈스키, 그 삶과 음악>,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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