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들에게

by 새 이름 posted Aug 21, 2015 Likes 0 Replies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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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들에게

카라님의 글에 대한 단상을 피력해 본다. 개인에 대한 평가 같아 조심스럽지만 이곳의 개방 흐름과 소통의 미명하에서 충분히 용납이 되리라 여긴다. 원점타격을 하는 단정적 율사 입장의 논지도 다 용납이 되리라 여긴다. 유동적인 단정임을 새삼 밝히며 유형파악에 대한 좋은 샘플로 여긴다. 이곳의 여러 카라들을 향한 대척자로 서보고자 한다.


카라는 동성애지지등 이 판의 기울기와 대세를 향한 입맞춤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나름의 진보적 소신을 실은 허심탄회한 글이지만 시종 공동체의 기성 개념을 허무는 반란군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카라님은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간절함이 내재된 성경의 방향과 교회의 진정한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 ‘희망의 종말론’이란 직설하면 옛 시대 노아의 방주를 조소했었던 비류들이 가졌던 인본주의 사고로 여겨진다.


글쓴이는 담백한 표현과 적합한 어휘구사로 보아 교육 받은 지성이라 여겨지며 기성교회의 경직된 부동성에 대한 거부감과 생채기 편력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거침없이 교리를 타격하는 신앙 진술로 미루어 자신의 시야에 대한 유아독존, 호기남아의 유형으로 단정되어진다. 내적으로는 피폐한 영혼으로 신앙파탄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여진다.


심리적으로 이미 공동체 일원을 포기한 것으로 여겨지며 생사의 마지노선인 성경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은 아닐지라도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유형임은 본인의 피력으로 나타나있다.


어떤 배경으로 이 진부한 재림교회의 일원의 되었는지 모르지만 꾸준한 자기거부로 일관하는 수용적 신앙보다는 한낮 개똥의 소리도 거부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철학 쪽에 더 적합한 스타일이 아닌가 보여 진다.


막무가내의 삶을 살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교회’라는 숙명적 과제와 부딪혀야만 한다. 카라의 시야에는 성경의 종결인 ‘감춰진 보물은’ 고릿적 책속에 나오는 꿈속의 이야기로 여겨질 것이다.


신앙유형을 입맛에 맞게 제멋대로 분류할 수 있지만 명증한 이원화 나눔이 있는 것이다. 양과 염소처럼 이원화의 분류가 성경이란 옛날 책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원화란 이런 것이다. 보물을 감지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두 부류가 있을 뿐인 것이다. 착하고 악하고는 차치하고 약속을 믿느냐 마느냐가 신분의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약속의 땅은 오랜 세대를 거치며 수많은 인류를 시험하며 진정한 생사를 판가름해 왔다.


감춰진 보물을 포착한 자에게는 신앙은 과학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고단하고 지리한 율법 수행자의 길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위 카라의 신앙은 관념 속에 머물러있다. 누구의 책 제목처럼 ‘만들어진 신’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과학을 중시하는 수많은 카라들에게 보편적 증명이 수반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땅을 과학화시키는 것은 거의 요원한 일일 것이다.


기존의 프레임을 벗어나려는 좌충우돌 카라들과 따논 당상식의 안도주의들이 십자가 군사들의 양극점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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