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성경에서 시작했다

by 카라 posted Aug 22, 2015 Likes 0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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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경에서 시작했다. 모태 교인으로 태어나 성경을 '나의 사랑하는 책'으로 삼았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문자 그대로, 우리네 표현을 따르면, '말씀' 자체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 속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이 방법론은 대세였다. 성경에 정통했다는 목사들도 여기에 기초해, 성경을 가르쳤다. 주변 어디를 봐도 모양만 다를뿐 이것이 전부였다. 의문은 있었다.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니. 자기모순적 논리 아닌가. 하지만 이게 내 환경에서 주어진 최선이었다. 그래서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성경 안의 모순들에 직면했지만 외면했다. 기도가 부족해서라던가, "말씀"을 더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기도하며, 성경을 성경으로 풀려고 했다. 전체 문맥과 상관 없이 단어, 혹은 몇구절에 의존하는 이 방식을.

다니엘서를 공부했다. 계시록을 공부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실제적 역사와 달랐다. 책들을 뒤져가며 비교했다. 그럴수록 이 차이는 더 크게 다가왔다. 계시록에 가서는 그 난해함은 더욱 커졌다. 김대성, 신계훈 등등의 계시록 연구 관련 책들을 교재로 삼았다. 그런데 헛웃음만 나왔다. 논리적 조잡성은 실망감만 안겨줬다. 그 가운데 스테파노비치의 계시록은 달랐다. 자신의 사상을 모두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목말랐던 내겐 충분했다. 

예언의 신을 읽었다. 수없이 시대의 소망을 읽어내렸갔다. 시대의 소망에서 보여준 예수가 내게 얼마나 달콤했던가. 그런데 표절이란다. 대부분을 베꼈단다. 계시를 받아 쓴 글이 어찌 이러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예언의 신들을 읽었다. 그런데 왜 논조와 내용들이 달라지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초기를 지나 중기, 후기 글로 가면서 발생한 상호 모순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일관성이 없는가.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는 불변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나의 무지를, 믿음 없음을 탓했다. 

그래서 역사를 찾았다. 재림교회 역사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초기 재림교회가 삼위일체를 부인했다고? 이뿐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재림교회와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너무나 달랐다. 재림교회의 역사가 흘러가면서 교리들의 변화들이 나타났다. 정신이 없었다. 불변하는 진리 안에서의 재림교회는 도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고민들은 계속됐다. 하늘성소의 실재성, 지성소 봉사, 마지막날 사건들,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들... 그리고 대속까지. 대속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지적 고민이었다면, 대속은 개념적으로 머물었기 때문에 더 큰 고민이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의 대속이 아무런 감흥/감동/슬픔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금식하며 알게 해달라 외쳐도, 그건 지적 동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제적 사건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예수는 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선지자요, 구원자였으나, 다른이들이 말하는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어린양은 아니었다. 이 간극속에서 난 깊은 갈등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냥 이건 내 잘못으로 느껴졌다. 나의 믿음 없음을 탓하며. 

이러한 가운데, 한 선생님을 통해 성경 해석학을 접하게 됐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내가 지금껏 성경을 읽어내린 방식이 축자영감론(문자주의)에 기초했다는 것을, 그리고 재림교회는 사상영감론을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자의 시대적 맥락/이해/지식 안에서 주어지는 계시. 이와 더불어 재림교회의 정체성이, 과거의 자리에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됐을땐 희열을 느꼈다. 

'재림교회'의 새안경을 쓰고 바라본 성경과 예언의 신은 더이상 내게 모순의 책이 아니었다. 엘렌화잇의 모순? 그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주어진, 엘렌화잇의 이해 안에서 쓰여진 글로 받아들이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성경도 마찬가지였다. 각 시대에 맞는, 그 빛안에서 계시가 주어진 것이었다. 시대의 소망을 베꼈다? 하나님이 불러주는대로 쓰는 축자영감도 아닌데, 그녀에게 사상으로 주어진 계시들과 비슷한 다른 책을 가져다 쓰는게 큰 잘못이던가. 저작권 문제도 없었던 시절에. 이렇게 봇물 터진 생각들은 끝없이 확장되어 갔으며, 내게 자유를 선사해줬다. 성경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또한 불트만부터 시작해 칼바르트, 슈바이쳐, 구티에레즈, 폴 틸리히, 바트 얼만에 이르기까지 어느 신학자들의 책도 내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불어 이후로 이어진 동성애, 안식, 노동, 환경, 인권에 대한 생각의 원동력이 된 것 역시 이때 읽은 성경 덕분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나는 재림교인인가'라는 때아닌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가. 나는 분명 재림교회에서 받은 안경으로, 성경과 예언의신들을 읽어나갔다. 재림교인이라 생각했고, 그리 믿어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주류 재림교인들과 달랐다. 그리고 그 간극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이건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건... 외로움/고립감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림교회의 한계를 본다. 시대와 소통되지 못하고 우리만의 문법에 갖혀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더 본질적 괴로움은, 소통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재림교회의 방향성이다. 이 상황속에서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자신/타인들에게 보여진 것들이 재림교회의 전부가 아님을. 당신들이 바라보는 성경만이 유일한/불변하는 진리가 아님을. 세상과 조화되게 희망을 말할 수 있다고. 나 같은 '사이비' 재림교인도 있다고. 

난 성경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으로 마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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