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를 구원하려는 뜻의 종교 : 거짓 종교와 참 종교를 가르는 기준 |
함석헌의 사상과 신앙 5 |
김희헌 한신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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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에게 종교는 하나님의 뜻을 앎, 즉 “정신의 숨 쉼”이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일어서는 씨알의 몸부림 자체다. 따라서 종교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종교제도나 성직자가 아니요, 하나님을 설명하는 교리나 신학에 의해 종교가 일어서고 죽는 것도 아니다. 종교의 주체는 씨알이요, 씨알의 스스로 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종교의 실재가 형성된다.
“모든 종교는 다 하나입니다. 나만이 참 종교라는 교파는 거짓입니다.... 종교가 생명에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버릇이 종교입니다. 믿음은 누구나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하는 것일수록 참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생명의 스스로 함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고 사람의 바탈이기 때문에 직업이 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정신의 숨 쉼입니다.” (“생활철학” 61년, 13:71)
종교란 “생명의 버릇”이기 때문에, 생명을 실현하는 씨알 스스로가 종교의 주체다. 그 스스로 함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면, 스스로 하는 씨알과 스스로 하게 만드는 뜻(까닭)의 원천인 하나님 사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을 수 없다. 성경의 증언처럼, 하나님은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운 곳에 계신다 (예레미야 23:23). 하나님은 세계의 한 속성이나 세계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씨알의 알영과의 관계로 보면 세계 안의 그 어떤 관계보다도 가까이 계신다. 가까운 사이에는 다리가 필요하지 않으며, 또 가장 가까운 사이에는 어떤 다리도 놓을 수 없다.
“큰 것은 하나님이요, 큰 것은 나다. 하나님과 직접 연락된 내가 ‘한’ 곧 큰 것이요, 그 직선을 중축으로 삼으면 온 우주를 돌릴 수 있다. 그러니 나에까지 뚫리지 못한 종교,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 참 종교 아니다. 나의 종교가 종교다.... 하나님은 음란을 미워하신다. 중보(仲保) 소리 많이 하는 종교, 협잡 종교다. 그리스도가 중보란 말은 중보 없단 말이다. 예수의 단 하나의 목적이야말로 중보 없앰이었다.” (“씨의 설움” 59년 12월, 6:89-90)
따라서 종교가 성직제도나 교리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거꾸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씨알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명활동의 실재를 비춤으로써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렇다면 뜻과 실재가 만나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생명의 실재란 무엇인가? 함석헌은 생명의 근본원리를 “고(苦)”에서 찾는다.
“고(苦)는 생명의 근본원리다. 고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고를 피하고 낙을 맞으려는 사람은 영원히 고를 못 면할 것이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보지 못할 것이다. 천국에 가면 눈물도 한숨도 없는 데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줄만 믿는 사람이 참 종교가 무엇임을 모르듯 모든 싸움을 다 싸워내며 무풍지대의 유토피아가 올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넷째 판에 부치는 말” 65년 9월, 30:25-6)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는 고통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고, 죄가 사라진 구원에 이를 때 고통도 사라지게 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 말은 어쩌면 실재에 대한 증언이라기보다 관념적 추상에 가깝다. 실재의 세계에서는 고(苦)가 없다면 우주사의 전개가 멈추고 말 것이다. 고(苦)가 없다면 미래도 없다. 거기엔 고(苦)를 넘어서기 위한 생명의 약동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苦)가 없는 나라는 죽은 나라요, 살아있는 우주에 고(苦)가 없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고(苦)의 무게로 탄식하지만, 또 한편 고(苦)를 이겨가며 생명을 고양시킨다. 고난은 늘 함께 하지만, 고난은 또한 늘 극복된다. 역사 속에서 같은 고난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여도 역사가 “나선운동”으로 나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苦)가 생명의 원리요, 생명이 전개되는 장이 역사요, 역사가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라면, 하나님과 씨알의 접선현장을 다루는 종교사상이 주목해야 할 최초의 지점은 역사 속에서 민중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이지 않을까? 성경 역시 하나님과 민중의 최대 접선장소를 민중의 고난 현장으로 본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참 씨알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가 그 고난의 상징이요,예수의 마지막 외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요)”라는 고난의 절규는 하나님과 가장 깊이 만난 역사의 현장에서 외쳐진 것이었다 (마가복음15:34). 민중의 고난에 대한 증언, 바로 여기서 새 종교와 낡은 종교가 나뉜다. 함석헌의 시 한편을 보자.
“언제야 당신은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 오,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 언젭니까? / 왕들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백성입니다! / 옥좌나 왕관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그들은 당신 가슴의 꽃, 오, 하나님 / 풀처럼 시들게 마소서 그들을 / 그 믿은 것이라곤 그늘진 날뿐 / 하나님 민중을 건지소서....” (“당신은 언제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연대미상, 23:502)
함석헌은 “제도의 종”이 되어 “묵은 전통을 자랑”하고 “신화적인 설명을 강요하기 위해 과학을 원수처럼 아는 종교”를 낡은 종교라고 비판한다. 왜 이렇게 종교가 낡아 가는가? 그것은 종교가“힘의 철학에 의해 작용”하고, 향락을 추구하는 “가짜 종교”의 노릇을 하는 데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성종교가 왜 “힘 숭배의 이교(異敎)에 무릎을 꿇고 치마를 벌려 음행을 하는” 일에 빠져 있는가? 그것은 뜻을 분별하는 일에 어두워져, “이 지나가는 세계의 특색인 힘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교회는 “지도자나 개척자”가 되기보다, “소유자나 향락자”가 되고 말았다. 종교의 이러한 쇠퇴는 문명의 타락을 초래한다.
타락한 문명을 돌이키는 일에 관심하지 않는 낡은 종교는 종교 자체가 지닌 생동감을 잃고 스스로 몰락해간다. 그 증상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첫째, 정신의 지체(遲滯)다. “새 술은 새 부대”를 요구하기 마련인데, 낡은 종교는 교리에 안착하여 스스로의 정신을 마비시킨다. “믿음이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정신은 “스스로 역사를 버리고” 자살하기에 이른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30:38).이런 종교정신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피안적인” 성격을 강화한다. 함석헌은 “천당지옥 소리가 높은 것은 실인간에게 매력을 잃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새 시대의 종교” 55년 3월, 14:51).
둘째, 스스로 굳어진 종교정신은 그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길러내지 못한다. “지혜롭고,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한 마음 (잠언 1:3)”을 길러 역사에 바치기보다는,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신앙인만 배출한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쿵덕쿵덕하는 굿 구경을 가서 저도 모르게 으쓱으쓱 춤을 추며 구경을 하다가 다 끝난 후에 떡이나 먹는 놀음이 아닙니다.... 그저 값없이 준다니까 달려갈 줄만 아는 것은 아직도 욕심만이고 도덕의식은 없는 어린애 같은 심리지,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아는 장성한 사람은 못 됩니다” (“새 계명” 81년 가을, 15:52-3).
셋째, 낡은 종교는 그 선교활동 역시 방향을 잃고, 제도에 굴복하거나 제도를 강화하기 위해 폭력적이 된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잘못된 선교행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복음이 땅 끝까지 퍼졌다면 듣기는 좋지만, 자본주의로 노동자를 착취해 얻은 돈의 한 부분을 선교 사업으로 빛나게 쓰는 재벌 앞에 훌륭한 보고거리는 되겠으나, 이교도 ․ 약소민족 ․ 원시토인에겐 조금도 복될 것이 없다. 그 기독교 아니더라도, 유럽 문명 아니더라도, 그들이 오늘보다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새 삶의 길” 1959년, 2:223).
종교정신이 낡아가면서 스스로 뒤쳐짐으로써 타락할 때, 그 종교가 속한 문명 역시 참혹한 힘의 철학 앞에서 “풍파에 부대낀 사공이 모든 연장을 내던지고 죽든지 살든지 불문하고 일시의 평안을 얻으려 드러눕”듯이 흘러가고 만다. 그것은 “낡은 종교에 지친 인생이 낙망하고 반동으로 하는 일”이다 (“새 시대의 종교” 55년 3월, 14:68).
필요한 것은 “새 종교”이다. 낡은 종교는 종교의 본성상 종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함석헌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종교가 다 이때껏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절대미를 주장하려고 애걸해보았다. 자기만은 영원의 여왕으로 두어 달라 했다. 하나님을 이 장막 속에 모시고 독점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허락하시지 않았다. 종교란 종교는 다 낡아버렸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 내용으로는 어떻게 고상한 진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절대 진리다’ 하는 순간 그것은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요, 남이 보기엔 어떻게 열심 있는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 믿음은 절대 정신(正信)이다’ 하는 순간, 곧 불신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질 수밖에 없다.” (“새 시대의 종교” 55년 3월, 14:18-19)
종교가 “정신적 낡은 질서에 대한 혁명”이라면, 종교 자체가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져서 종교 본래의 “천작(天爵)”을 회복하고, “시대를 감시하고 가르치고 심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함석헌은 그 일을 두 차원의 활동이 통합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 첫째는 “사상의 새 종합”을 하는 일이요, 둘째는 “민중의 친구”가 되는 일이다. 새 종교는 그 종교정신이 “힘과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랑의 철학”을 통해 “사랑과 감사”의 세계를 그려볼 수 있도록 사상을 새롭게 종합하고, 또 그 사상의 진실을 민중의 친구가 되어 산 증언으로 입증하는 종교이다. 이 종교를 통해서만 새 세계가 밝아올 것이다.
함석헌에게 종교는 “살아있는 동안에 악과 싸우는 것”이다. 새로운 종교는 새로운 교조를 모시고 새로운 교리를 만들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종교는 스스로 새롭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종교다. 그러나 어떻게 악과 싸울 것인가? 우주전체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제의 세계에서 선과 악은 개체로 분리되지 않고, 선도 “전체의 선”이요, 악도 “전체의 악”이다.
함석헌은 종교의 싸움을 전체를 고려하는 새로운 사상의 추구에서 찾는다. 그것이 “뜻을 찾음,” “현상의 세계를 뚫음,” “절대에 대듦”이다. 새 종교의 비전이 현상세계의 개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힘과 공포”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전체의 미래에서 “사랑과 감사”를 드러내는 사상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교가 싸우는 혁명이 참되려면 그것은 전체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랑과 감사”로 충만해야 한다.
종교가 현상세계를 뚫을 수 있는 길은 절대에 대듦으로써만 가능하고, 절대에 대듦으로 얻게 되는 것이 뜻이다. 함석헌은 이 뜻을 붙잡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이다. 범재신론의 세계관에서 우주 전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이 전체를 길러내는 창조주시다. 따라서 뜻을 알았다는 것은 전체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이다. 전체의 구원을 바라는 것은 값싼 감상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구원에 갇힌 종교가 유치한 이기주의다. 구원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함석헌의 사상은 각 개인이 처한 비극적 실존에 대한 아픔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의 극복은 오직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함석헌의 사상은 우주의 생명 전체가 그 근원인 하나님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우주론적 넓이와, 생명이란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한 ‘전체로서의 생명’임을 보여주는 존재론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기반하여 함석헌의 “보편적 세계사상”이 전개된다.
“생명은 전체에만 있다. 전체가 생명이다. 선도 전체가, 악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선한 자 상 주고 악한 자 벌 준다는 것은 소학에서나 하는 방편의 가르침이지 참이 아니다. 참에서 보면 선 ․ 악이 한 뿌리에 달렸다. 어떤 선도 캐어 들어가면 악에 연접이 되어 있고, 악도 캐어 들어가면 선과 연접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을 죽임이 없이 악의 뿌리를 뽑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받은 예수가 가라지 뿌리를 뽑지 말라,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라 한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어진 교훈이 있을 수 없다.” (“대학이란 무엇이냐” 1965년 10월, 3:26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적 보편주의는 실천적 구체성이라는 다른 한 축을 지니고 있다.그의 사상은 사유의 보편성과 실천의 구체성을 동시에 지지한다. 함석헌은 전체의 구원을 향한 종교는 저 홀로 빛나는 “구슬”이 되기보다 전체를 위해 썩어질 “씨”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는 사색의 교양으로 영롱한 추상(抽象)을 담은 구슬이 아니라, 믿음의 현실에서 미래의 전체를 위해 “씨”가 되는 것이다. 씨가 되는 것은 구체적인 일이다. 그러나 구체성이야말로 종교적 진리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길이다.
함석헌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보편은 반드시 추상적이어야 하지만, 종교적 실천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가장 구체적이 아니고는 가장 보편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하늘나라는 전체가 구원받는 나라이지만, 그 나라가 겨자씨 한 알에 담겨있는 것처럼, 전체의 구원과 해방의 뜻을 깨달은 옹근 씨알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함석헌이 행하는 사상적 모험의 목적이라 할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은 사색적이면서 실천적이며, 통합적이면서 비판적이다. 이 두 정신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하나님을 찾기까지, 다시 말해 “생명의 뚜렷한 빛에까지” 막힘이 없는 사상을 구축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새 종교”를 마련하여 인류를 동원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내려 하였고, 그것은 다른 한편 미신 즉 낡은 우상과의 투쟁이었다. 낡은 세계관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관념우상을 깨뜨리는 일은 새 시대를 열어갈 종교사상이 반드시(necessary) 해야 할 작업이요,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이라는 물질우상을 깨뜨리는 일은 종교사상으로서 자기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sufficient) 입증하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함석헌은 이 두 우상을 깨뜨리도록 “전일화하는 인류적 동원령”을 내리기에 필요충분한 사상적 조건을 마련코자 했다. 타락해가는 한국 기독교에 “예언의 꿈과 별의 징조를 가진” 종교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가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데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보배로운 씨앗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