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3회 도쿄 납치 <상>) 박정희는 김대중을 회유하려 부통령직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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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일반

박정희는 김대중을 회유하려 부통령직을 제안했다

등록 :2015-09-06 16:50    한겨레신문수정 :2015-09-0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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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3회 도쿄 납치 <상>
1973년 8월8일 김대중은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의 숙소에서 한국말을 쓰는 괴한들에게 끌려 사라졌다. 앞서 7월6일 한민통의 미주본부 출범에 이어 일본본부를 준비하던 중 이희호가 예감했던 불길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대중이 쓰던 파이프와 입고 있던 양복 윗도리가 그대로 남아 있던 납치 현장 모습으로 일본 방송에서 보도한 화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8월8일 김대중은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의 숙소에서 한국말을 쓰는 괴한들에게 끌려 사라졌다. 앞서 7월6일 한민통의 미주본부 출범에 이어 일본본부를 준비하던 중 이희호가 예감했던 불길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대중이 쓰던 파이프와 입고 있던 양복 윗도리가 그대로 남아 있던 납치 현장 모습으로 일본 방송에서 보도한 화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이 망명생활을 하던 중인 1973년 4월 이희호와 동교동 식구들은 또 한 번 수난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렸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사소했다. 4월25일 이희호는 시동생 김대의, 동교동 비서 몇 사람과 집에서 시국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윤필용 사건’을 화제로 올렸다. 이희호는 몰래 입수한 외신을 보고 윤필용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은 박정희가 키운 육사 8기의 우두머리였고 군대 안 사조직인 하나회의 핵심이었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육군 대장이 소장 윤필용에게 세배하러 간다는 말이 돌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윤필용은 측근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해 노망기가 들었으므로 이젠 물러나야 하고 후임자를 물색해야 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필용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던 박정희는 1973년 3월 보안사령관 강창성에게 윤필용을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윤필용은 즉시 보안사로 연행돼 3월26일 구속됐고 군사재판 끝에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됐으며 재판이 끝난 4월28일에야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희호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일본 신문을 읽고 알게 된 것이었다.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에 앞서 이희호와 동교동 사람들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의 ‘이후락 후계자 발언 사건’ 탓에 엉뚱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사진은 1972년 평양 밀사로 ‘7·4 남북 공동성명’을 합의해내며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시절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에 앞서 이희호와 동교동 사람들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의 ‘이후락 후계자 발언 사건’ 탓에 엉뚱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사진은 1972년 평양 밀사로 ‘7·4 남북 공동성명’을 합의해내며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시절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한겨레 자료사진
동교동 사람들이 윤필용 이야기를 한 다음날 김대의와 비서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집 주위 사방에 감시의 눈이 번득였지만 그렇게 작은 소리로 이야기한 것까지 새나갔다니 믿을 수 없었다. 비서들과 시동생은 중앙정보부에서 나흘 동안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다. “그 불온문서 누가 가져왔어?”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일본 신문을 두고 ‘불온문서’라고 했다. ‘모른다’고 버티자 전기고문을 했다. 고문은 실신상태에 이를 때까지 계속됐다. 이희호도 집에서 사흘 동안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두 번이나 썼다. 이희호는 5월7일 남편에게 쓴 비밀편지에서 사정을 알렸다. “나는 어느 한 사람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게 비서들 대신 나를 데려가라고 말했고, 차라리 내가 잡혀가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것과 그들 가족들에게도 미안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이희호는 동교동 비서 가운데 한 사람이 사실을 알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그 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동교동에 발길을 끊었지요.” 이희호는 그 비서를 나무라지 않았다. “동교동 사람들은 늘 협박과 탄압에 시달렸어요. 그 비서도 그걸 못 견디고 저쪽에 넘어간 거였지요.” 이희호는 그 뒤로 더욱 말수가 줄어들었다. “집안에서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요. 조지 오웰이 그린 공포의 ‘동물농장’이 유신시대 한국이었어요.” 그 시절 이희호는 누구라도 집으로 전화를 걸어오면 수화기를 들자마자 “이름 대지 마세요”라는 말부터 했다. 통화를 도청하는 중앙정보부가 전화 건 사람을 잡아다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김대중은 1973년 1월5일 미국을 떠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김대중의 국외 활동에 신경이 곤두선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손발을 묶을 방안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짰다. 그 방안 중에는 김대중을 회유한다는 것도 있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과 가까운 일본 정계의 중진 의원을 통해 ‘통일문제를 전담하는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을 맡기거나 부통령제를 신설해 그 자리를 주겠다’는 박정희의 제안을 전달받기도 했다. 김대중은 제의를 일거에 뿌리쳤다. 이희호는 1월11일 비밀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간에는 당신이 정부의 교섭을 받고 돌아와서 감투를 쓰게 된다는 낭설도 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당신을 못쓰게 만들려고 갖은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든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시동생, 비서들과 한 말도
중앙정보부는 훤히 알고 있었다
알고보니 가장 믿었던 비서가
그들의 협박에 넘어간 것이었다

미국서 망명 생활하던 김대중은
반독재투쟁기구 구성에 나섰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회유하려
부통령제 신설 등을 제안했다
정보부가 무슨 짓 할지 모르니
‘절대 귀국말라’ 신신당부했다
이희호는 기도로 하루를 보냈다
“당신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도뿐”

8월초 납치 제보가 들어왔지만
김대중은 매일 숙소를 옮기며
일본 한민통 결성에 속도를 냈다

8월8일 일본 방송기자 네댓명이
느닷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뒤
정체 모를 사람이 전화를 해왔다
“도쿄 호텔에서…” 심장이 ‘쿵’ 했다

김대중은 이 시기에 일본에서 <독재와 나의 투쟁>을 집필해 박정희 유신독재의 실상을 알렸다. 이 책은 뒷날 한국에서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판됐다. 김대중은 3월25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각지를 돌면서 유신 반대 투쟁을 이어갔다. 이때에도 중앙정보부는 끊임없이 방해공작을 폈다. 5월18일 샌프란시스코 인터내셔널홀에서 연설을 할 때는 한인 폭력배들이 강연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김대중이 등단하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소동을 벌였다.
납치 직전 김대중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해 연루 의혹을 받았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당수가 8월11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사건 현장 약도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해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납치 직전 김대중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해 연루 의혹을 받았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당수가 8월11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사건 현장 약도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해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6월23일 한국에서 박정희는 ‘평화통일 외교정책’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6·23선언’에서 박정희는 남한과 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북한을 독립 정부로 인정하는 중대한 정책 전환이었다. 김대중이 1년 전 내놓았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제안을 박정희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통일·외교·안보 정책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주장을 뒷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앞에서는 친북·용공 딱지를 붙여 정적을 탄압했다.

김대중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미국에서 김대중의 생각을 지지하고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김대중은 재미동포들의 뜨거운 호응을 모아 반독재 투쟁을 이끌 구심체를 조직했다. 1973년 7월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김상돈·이근팔·문명자·임창영을 비롯한 미국 내 민주인사들이 참여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이 자신에게 용공·친북 올가미를 씌울 빌미를 찾고 있음을 알고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하고’ ‘민주화를 먼저 이룬 뒤에 통일을 촉진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이 시기에 김대중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뜻과 함께 ‘독재를 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주문을 내놓았다.

한민통 미국본부를 세운 김대중은 7월10일 다시 태평양을 건넜다.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에 도착해 김대중은 지식인들이 읽는 진보 월간지 <세카이>(세계)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와 대담했다. 대담 말미에 야스에는 김대중의 신념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입니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김대중은 재일한인 동지들을 만나 한민통 일본본부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으고 창립대회를 8월15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기로 했다. 김대중은 한민통을 세계를 포괄하는 기구로 만들 생각을 했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캐나다에 지부를 만든 뒤 점차 넓혀 나가 국제적 조직망으로 유신체제를 압박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뜻하지 않은 사태의 돌발로 중도에 어그러졌다.
8월15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예정대로 열린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식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김대중 납치 만행을 규탄하는 성토장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8월15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예정대로 열린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식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김대중 납치 만행을 규탄하는 성토장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5월 초순 이희호는 중앙정보부 고위간부를 만났다. “대한여자청년단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김정례씨가 어느 날 나에게 연락을 해왔어요. 자기랑 가까운 이용택씨가 중앙정보부 6국장이 됐는데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김정례씨 집에서 이 국장을 만났지요.” 중앙정보부 6국은 국내정치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용택은 이희호에게 남편이 국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니 귀국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희호는 남편에게 귀국하는 게 좋겠다는 편지를 써서 이용택에게 보여준 뒤 미국에서 온 막내 올케 편에 보냈다.

이와 함께 5월16일 비밀편지를 따로 써서 매신저를 거쳐 보냈다. “이 국장 말이 (…) 귀국하면 신변이 위험하다는 둥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에 있어도 만일 자기들이 생명을 노린다면 감쪽같이 없앨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생각지 않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것이라고 해요. 정보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요. 각별히 주의하세요.” 이희호는 중앙정보부의 회유를 믿지 않았다. 이희호는 6월20일 편지에서도 중앙정보부를 믿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용택 국장이 당신을 귀국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그 자리에 오게 된 듯하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몸을 조심하셔서 끝까지 싸워 이기셔야 해요.”

이 편지는 이희호가 이 시기에 기도로 일과를 보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내가 당신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예요. 그래서 나는 밤 12시 전에는 자리에 눕는 일이 없어요. 아침 5시에 다시 기도 시간을 가져요. 나의 욕심이나 내 부귀와 영화를 바라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고 진실로 내 나라와 민족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당신을 지켜주시고 하느님 뜻대로 행하고 순종하는 일꾼으로 써 주십시오’ 하고 드리는 기도를 꼭 이루어주실 거라고 믿어요.” 이희호는 7월8일에도 편지를 써 “어떤 경우에도 귀국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경고했다. 김대중이 귀국할 가망이 없게 되자 중앙정보부는 마지막 수단으로 손을 뻗쳤다.

남편의 망명으로 밤잠을 못 이루던 어느 날 민주통일당 의원 김경인이 이희호를 찾아왔다. 김경인은 김대중과 가깝다는 이유로 유신 직후 계엄령 아래서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우리 집에 온 김경인 의원이 ‘일본에 가려고 하는데 여권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그래서 김 의원에게 ‘만일 일본에 가게 되더라도 남편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요.” 이희호는 중앙정보부가 김경인 뒤를 밟아 남편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했다. 7월 어느 날 이희호는 신문에서 김경인이 민주통일당 총재 양일동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민주통일당은 유진산 체제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9대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을 탈당해 만든 당이었다. “그때 나는 바로 남편에게 편지를 썼어요. 두 분이 일본에 갔는데 혹시 연락이 오더라도 가능한 한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지요.”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대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숙소를 바꿨다. 중앙정보부가 미행하고 감시한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김대중을 따르는 청년들이 경호를 맡겠다고 나섰다. 언제 어디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김대중은 한민통 결성 작업에 속도를 냈다. 7월29일 김대중은 일본에 온 양일동을 만났다. 아내가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체재비 도움도 받고 국내 소식도 듣고 싶어 위험을 무릅썼다. 도쿄에 머무는 동안 양일동은 병원에 다니며 당뇨병을 치료했다. 병원을 방문한 김대중은 양일동이 귀국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기로 했다. 중앙정보부가 납치하려 한다는 제보가 8월 초 김대중 쪽에 입수됐다. 김대중은 한민통 결성 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 숙소를 옮기며 검은 그림자들을 피했다.
1973년 3월 보안사에 끌려가 비밀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받은 윤필용의 모습으로, 4월28일 언론에 공개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3월 보안사에 끌려가 비밀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받은 윤필용의 모습으로, 4월28일 언론에 공개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8월8일 이희호는 유언비어 유포죄로 복역하던 남편의 친구를 면회하러 안양교도소에 갔다. 외국에서 발간되는 잡지 기사를 복사해 나눠 본 것이 죄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중앙정보부 차량이 이희호의 차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는 일이라 미행 차량을 달고 교도소에 면회하러 가는 것조차 나들이 같았다. “그동안 옥고에 시달리는 분들을 찾아가보지 못해 미안했거든요. 이용택 국장을 만난 김에 남편 친구 면회를 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허락해주었어요. 고생하는 분을 면회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가벼웠어요. 돌아오는 길에 안양포도원에 들러 포도 세 관을 사서 한 관은 미행하는 차에 주었어요.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인데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그래서 고생한다고 주었지요. 그리고 한 관은 우리 운전기사에게 주고 나머지 한 관은 집 식구들과 먹으려고 차에 싣고 왔지요.”

집에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본 텔레비전방송 기자 네댓 명이 들이닥쳤다. 유신이 선포된 뒤로 열 달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응접실에 들어서더니 집안 이곳저곳을 막 찍어댔다. “나는 영문을 몰라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필름을 마지막 비행기 편에 보내야 하니 갔다 와서 알려주겠다고 하고는 그길로 뛰어나가는 거예요. 나는 나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뭔가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 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보냈지요.”

얼마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점잖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김대중씨가 도쿄 호텔에서 행방불명된 것을 아십니까?” 신원을 알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희호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혼이 빠져나간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해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지금도 몰라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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