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도 버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도 버리고, 바울의 도그마도 버리면 오로지 하나님 예수가 우리 앞에 보인다

by 해람 posted Sep 16,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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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지음 <예수냐 바울이냐 >의 출판사(삼인) 서평 중에서 기독교는 2000여 년 동안 바울 신학을 추종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며 온 세계에 전파했다.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민족이 대망(待望)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다. 그리고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을 유일신이라며 앞으로 올 메시아왕국이 온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메시아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처했다. 저자 문동환 박사는 이러한 바울의 기독교 신학을 어처구니없는 민족주의의 결과라 평가한다. 그 후 기독교는 이것을 그대로 답습해 유대인들이 섬기던 신이 온 인류를 다스리는 유일신이라며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메시아가 되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망 공동체’를 조성했다.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진 다윗왕국의 수호신을 어떻게 온 인류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기독교는 언제나 강자 편에 서 있었다. 바울은 예수가 다시 오시면 로마제국을 비롯한 이 세상 나라들은 모두 정리되고 메시아왕국이 통치하는 세상이 된다고 하였는데, 예수의 재림을 고대하던 ‘대망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오히려 그 제국이 하나 되게 하는 일에 공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는 베드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하면서 갖가지 권위주의적 과오를 범했다. 이에 항거한 종교개혁자들 역시 바울 신학에 바탕을 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이 세상을 장망성(將亡城)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은 국가를 통치하는 왕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바울이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 권한을 하느님이 세상 나라에 주었다고 말한 것이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문화가 장족의 발전을 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서구의 국가들은 식민지 확보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기독교 선교사들은 배를 타고 약소민족에게로 가서 장차 망할 이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 예수를 믿어 메시아왕국으로 가도록 하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교회 확산에 기세를 올렸으며 성서를 주고 땅을 빼앗는 일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성서에 이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보람차게 하는 깊은 진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영께서 강자들이 구축한 바벨탑에 짓밟혀서 아우성치는 무리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삼고, 새로운 내일을 찾아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들을 통하여 환희에 찬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성서의 첫 대목인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산업문화가 절정에 이르러 온갖 비극을 초래하는 오늘날, 그 가르침들은 새롭게 살아야 할 소망의 길을 제시해준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로 오늘 이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어떻게 재연시킬 것이냐를 생각해보자고 한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독교의 기본 틀을 그릇되게 잡은 바울 신학 및 그의 선교와, ‘생명문화공동체’를 창출한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를 비교하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주제이다. [출처] 바울의 신학 안에,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정신은 없다!|작성자 무릇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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