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사도>의 주인공은 사도 세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좀 이상하다. 사도 세자는 영화가 시작되면 바로 뒤주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결국 죽고, (스포일러지만) 그의 아들이 왕이 되어 그를 추모하거나 그의 부인을 위로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렇게 보면 영화의 주인공은 사도 세자가 아니라 영조가 되어야 한다. 영조는 처음부터 엔딩 직전까지 등장하고 고뇌도 가장 많이 하는 주동적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이들은 누구나 영조가 아니라 사도 세자에게 동일시를 느낀다. 왜 그런 것일까? 이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준익이 영조가 아니라 사도 세자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하는 이유.


사도세자라는 소재로 과연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연산군의 피 묻은 적삼 이야기만큼이나 식상한 소재. 조선 500년의 가장 불행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이 소재에, 사극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준익 감독이 도전했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다. 솔직히 말해 우려의 심정이 더 컸다. 혹 <황산벌>처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 장르를 비틀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건은 비극이고 비극의 정서 안에서만 작동해야 관객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공법을 택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이미 식상하고도 식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준익은 이 영화를 택했고 자신의 길을 간다. <왕의 남자>의 정공법처럼 비극의 정서에 기댄 채 이야기의 힘으로 온전히 스토리를 끌고 간다. 여기서 스토리의 핵심은 왜 아버지가 아들을 죽어야만 했는가, 일 것이다. 그것도 조선 후기 최고의 군주이며 태평 시대를 열었던 영조가 아들을 죽여야 했던 사연. 이준익은 그 사연을 천천히 들려준다. 뒤주에 갇힌 날을 시작으로 화면에 자막으로 날짜를 기록하면서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 시간 속에서 아버지 영조의 마음이 기대에서 분노로 어떻게 바뀌는지, 그 사이에 대왕대비, 중전, 사도의 생모, 사도의 부인, 사도의 아들, 대신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살핀다. 결국 영조는 사도를 죽이고 엔딩에서야 세손은 정조가 되어 등극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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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사도>는 이준익이 자주 그리던 이야기처럼, 두 남자 이야기이다. 이제까지 이준익이 주목한 것은 강한 두 남자의 대결이 아니라 나약한 두 남자의 아픔에 집중했었다. <라디오 스타>의 한물 간 스타와 매니저, <왕의 남자>의 궁에서 공연하는 두 춤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검객과 혁명가 등이 그러했었다. 이들은 대부분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여전히 실패하거나 죽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두 사람 이상의 남자가 등장하는 <황산벌> <평양성> <즐거운 인생> 등에서도 결국 패배하거나 죽거나 실패한 인생을 그렸다(이렇게 보면 <소원>은 정말 이상한 이준익의 영화이다. 가족 드라마라니. 하긴 그 가족 이야기가 다시 <사도>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로 부활하긴 한다.).


<사도> 역시 이런 관계 속에서 두 캐릭터가 움직이고 작동한다. 크게 보면 실패한 아버지와 실패한 아들의 무모한 대결 이야기.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결국에는 후회하게 되는 이야기. 이준익은 영조를 콤플렉스가 큰 인간으로 그린다.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지만 왕이 되었기에 아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컸던 아버지로서의 왕. 그는 아들에게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커버할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엄한 기대보다 한 자락의 사랑을 갈구했다. 자신에게 한마디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 왕으로서의 아버지보다 인간 아버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대와 욕구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 그로 인한 비극의 형성.


왕가는 평범한 가정일 수 없다. 권력은 부자(夫子)도 나누지 못한다. <사도>는 그 냉엄한 현실 속에서 아버지인 왕과 아들인 세자의 어긋난 비극에 집중한다. 며느리와 손자, 부인도 각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궁의 현실이다. 영화는 냉정하리 만큼 그 입장만 되풀이 한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사도 세자의 탈선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영화에 그려진 사도 세자의 탈선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궁 뒤에 무덤을 만들고 무당, 중 들과 함께 대왕대비를 추모하는 것 정도이다. 그 외에 그는 탈선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마지막이자 유일한 탈선이다. 다르게 말하면 세자는 자신의 길을 가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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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핵심을 이야기하자. 왜 영화는 사도 세자에 집중하게 만들었는가? 다시 말해 이준익은 이 낡은 소재로 어떻게 현재에 소구되게 만들었는가? 원론적이지만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단지 과거를 소재로 하고 있어도 영화 속에 재현된 그 과거는 현재가 필요로 해서 불러온 ‘현재화된 과거’이다. 역사학자 카의 유명한 명제처럼, 과거는 현재와 대화하는데, 영화로 만들어진 역사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 왜 사도 세자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영조 같은 이가 아버지가 아니라 회사의 상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상사가 매일 실적을 묻고 자세를 따지고 복장을 체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트레스도 그런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피로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영조가 아니라 사도 세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 영화 제목이 <영조>가 아니라 <사도>인 것도 이 때문이다. 회사라면 사직서를 쓰고 그만두면 되지만(물론 그것도 쉽지 않다), 사도 세자는 왕자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다. 그가 그만 두는 것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이다.


결국 사도 세자는 비운의 세자가 되어야 했다. 이때 실제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그가 정신병이 깊게 들어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왜 그가 그렇게 정신병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그 원인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 엄하디엄한, 그러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를 둔 아들의 절망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이런 생각도 해본다. 배우지 못한 부모의 한을 풀어달라거나 왕이 된 아버지처럼 자식(자신의 다른 이름이 자식이다)도 그렇게 되길 강박적으로 요구하며 입시에 처절하게 목을 매는 우리 시대 부모는 영조와 얼마나 다른가? 사도 세자는 조선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 여기에도 신음하는 숱한 사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