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도 제 나이 14살때 학업을 포기하고 충청도 고향 마을에서 대구로 내려가 작은 철공소를 다녔습니다.
학교를 다닐땐 단 한번도 싸가질 못한 도시락을 아침마다 할머니께서 준비해 주시면 그것을 들고 먼 거리의 공장까지 걸어서 출퇴근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새까만 교모에 단정한 교복을 입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제 또래의 중학생 아이들을 볼 땐 좀 창피스럽긴 했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저의 인생이기에 좌절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제가 그렇게도 고대하던 추석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시골에서 떠나올 당시엔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돼지우리 처럼 변하는 집으로는 다신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던 부모님의 집은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이상하게도 자꾸만 어린 동생이 보고 싶고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추석에는 가족들이 있는 고향을 다녀오기로 형과 굳은 약속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버스표를 미리 예약을 해놓는 장치가 있었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추석 전날 아침에 큰형과 같이 대구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가서 단양행 버스표를 어렵게 구했습니다.
평소에도 늘 북새통을 이루고 있던 터미널인 만큼 버스안도 많은 귀성객과 소지한 물건들로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했습니다.
지정좌석제가 아닌 선착순으로 먼저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이 앉아서 갈 자리를 확보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에서 버스가 터미널에 진입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일시에 많은 승객들이 출입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서 난장판이 되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좌석을 못 잡게 되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 여섯 시간을 꼼짝 없이 서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고향을 찾아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잘 차려 입은 옷에 손에는 각자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들고 서로들 빨리 버스에 올라타려고 밀고 당기면서 신경전을 펼치곤 했습니다.
저와 형은 당연히 앉아서 갈 좌석을 확보하질 못하여 중간에 있는 어느 의자의 손잡이를 꼭 붙잡은 체 좁은 복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쪽 의자 사이의 복도에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입석으로도 어찌나 많이들 탔는지 버스가 도로를 달리면서 덜컹거릴 때에도 바로 옆 사람의 등과 어깨가 그대로 맞닿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단양까지 올라가는 국도의 절반가량은 잘게 부슨 자갈을 바닥에 깔아 놓은 비포장도로가 절반을 넘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직행버스는 도로가 패여 나간 작은 웅덩이를 지날 때 마다 자주 덜컹거리며 차창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자동차를 자주 타 보질 않아서 그런지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멀미를 심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혹시나 하는 맘에 집을 나서기 전에 콩나물국에 밥을 아주 조금만 말아서 먹고 출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밀폐된 귀성 버스를 올라타자마자 온갖 퀴퀴한 냄새 때문에 저의 뱃속에서는 슬슬 매스꺼움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땀 냄새와 그들이 소지한 물건 속에서 풍기는 이상야릇한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제에게는 악취로 변해서 괴롭힐 뿐이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직행버스는 국도변을 지나가는 엔간한 소 도시의 터미널은 모두 들렀다가 다시 출발하곤 했으나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가 안동과 영주 그리고 풍기에서는 오히려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이 더 많은 듯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버스 안쪽의 사람들은 굳이 손잡이를 힘들게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될 만큼 승객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버스 안쪽의 공기는 더욱 탁해 지면서 심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체력도 거의 바닥이 난데다가 심한 멀미 증세까지 있어서 풍기에 다다랐을 땐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멀미 증세가 있게 된 이후부터 뱃속은 계속 부글거리고 목구멍에서는 구토가 나올 듯 말듯 한 증세까지 겹치면서 기진맥진해 있던 저는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땐 요즘처럼 휴대가 간편한 비닐 봉투가 흔하지도 않았던 데다가 미처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어떻게 해서든 무조건 멀미를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구토를 한다는 건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어서 저는 죽기보다 더 싫었습니다.
바로 그때 옆에서 함께 서가던 큰형도 저보단 심해 보이진 않았지만 역시 차멀미 때문에 얼굴색이 온통 하얀 백지장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풍기를 도착할 때까지는 몹시 힘은 들었지만 구토를 잘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상북도 풍기읍을 지나면서 우려했던 현실이 코앞에 닥치고야 말았습니다.
풍기에서 단양까지 가려면 경사가 가파르고 험난한 죽령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야 했는데 이런 도로를 지날 땐 멀미를 하는 저 같은 사람을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고 맙니다.
죽령고개는 어찌나 구불거리면서 높고 지형이 험한지 풍기에서 정상까지 멀미를 꾹 참고 올라가는 시간만 근 3~40여 분 가까이 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또 다시 그만한 시간을 거꾸로 내려가야 합니다.
버스는 마치 계곡의 낭떠러지 아래로 금방이라도 곤두박질 칠 것 같다가도 다시 산 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나오기를 여러 수도 없이 반복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꼭 붙잡은 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멀미가 무척 심한 저도 이를 악물며 끝까지 참아 내려고 죽을힘을 다해서 버텨내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면서 빠르게 내려가는 버스는 뱃속 내용물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 올라와서 기진맥진해 있는 저의 괴로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잠시도 쉴 틈을 주질 않고 더욱 심하게 뒤뚱거리며 내달렸습니다.
머리까지 빙글거리며 하늘이 돌기 시작하던 저는 이제 더는 멀미를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며 구토를 참아 내려고 해도 목구멍으로 자꾸만 이물질이 조금씩 넘어오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억지로 삼키길 몇 차례 시도를 했으나 그때마다 가스가 가득 들어찬 저의 더부룩한 뱃속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았고 누가 손가락으로 배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곧 터질 것 같이 빵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도 이제나 저제나 구불거리는 산길이 어서 빨리 끝나길 기다렸던 저의 바람과는 달리 돌고 도는 고개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바깥 풍경을 보아서는 버스가 이제 죽령고개를 거의 다 내려간 것 같긴 했는데도 휘어진 산길의 끝없는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제가 약간은 방심을 해서 일까 버스가 고개를 빠르게 휘돌면서 차가 사정없이 한쪽으로 기우뚱 거릴 때 저로선 어떻게 대비를 해볼 새도 없이 입 밖으로 꾹 참았던 구토가 마구 쏟아져 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재빠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얼굴을 의자 밑쪽으로 최대한 숙였습니다.
그 구토의 압력은 어찌나 센지 마치 굵은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듯이 한꺼번에 뱃속의 모든 이물질이 다 품어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제 주변에 빼곡하게 붙어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은 순식간에 뒤로 한발씩 물러섰습니다.
그 바람에 버스가 단양의 버스터미널에 도착 할때까지 오히려 넓은 공간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오는 대여섯 시간동안 멀미를 참아오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토를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머리도 맑아지고 뱃속까지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책 없이 마구 쏟아낸 오물과 심한 악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어디 옆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 있던 어느 누구도 저에게 더럽다거나 냄새가 나서 못살겠다면서 눈치를 주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치 저의 그 답답했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기라도 한듯이 말입니다.
해마다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저는 35년 전 콩나물시루 같이 복잡한 귀성버스 안의 풍경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땐 제가 너무 어렸었고 경황이 없어서 함께 버스를 타고 가셨던 승객들과 기사님에게 죄송스럽다는 말씀조차 드리지 못하고 온 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늦었지만 모두들 행복한 추석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끌고온글 미디어다음에서)
학교를 다닐땐 단 한번도 싸가질 못한 도시락을 아침마다 할머니께서 준비해 주시면 그것을 들고 먼 거리의 공장까지 걸어서 출퇴근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새까만 교모에 단정한 교복을 입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제 또래의 중학생 아이들을 볼 땐 좀 창피스럽긴 했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저의 인생이기에 좌절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제가 그렇게도 고대하던 추석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시골에서 떠나올 당시엔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돼지우리 처럼 변하는 집으로는 다신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던 부모님의 집은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이상하게도 자꾸만 어린 동생이 보고 싶고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추석에는 가족들이 있는 고향을 다녀오기로 형과 굳은 약속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버스표를 미리 예약을 해놓는 장치가 있었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추석 전날 아침에 큰형과 같이 대구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가서 단양행 버스표를 어렵게 구했습니다.
평소에도 늘 북새통을 이루고 있던 터미널인 만큼 버스안도 많은 귀성객과 소지한 물건들로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했습니다.
지정좌석제가 아닌 선착순으로 먼저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이 앉아서 갈 자리를 확보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에서 버스가 터미널에 진입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일시에 많은 승객들이 출입문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서 난장판이 되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좌석을 못 잡게 되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 여섯 시간을 꼼짝 없이 서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고향을 찾아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잘 차려 입은 옷에 손에는 각자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들고 서로들 빨리 버스에 올라타려고 밀고 당기면서 신경전을 펼치곤 했습니다.
저와 형은 당연히 앉아서 갈 좌석을 확보하질 못하여 중간에 있는 어느 의자의 손잡이를 꼭 붙잡은 체 좁은 복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쪽 의자 사이의 복도에는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입석으로도 어찌나 많이들 탔는지 버스가 도로를 달리면서 덜컹거릴 때에도 바로 옆 사람의 등과 어깨가 그대로 맞닿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단양까지 올라가는 국도의 절반가량은 잘게 부슨 자갈을 바닥에 깔아 놓은 비포장도로가 절반을 넘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직행버스는 도로가 패여 나간 작은 웅덩이를 지날 때 마다 자주 덜컹거리며 차창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자동차를 자주 타 보질 않아서 그런지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멀미를 심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혹시나 하는 맘에 집을 나서기 전에 콩나물국에 밥을 아주 조금만 말아서 먹고 출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밀폐된 귀성 버스를 올라타자마자 온갖 퀴퀴한 냄새 때문에 저의 뱃속에서는 슬슬 매스꺼움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땀 냄새와 그들이 소지한 물건 속에서 풍기는 이상야릇한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제에게는 악취로 변해서 괴롭힐 뿐이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직행버스는 국도변을 지나가는 엔간한 소 도시의 터미널은 모두 들렀다가 다시 출발하곤 했으나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가 안동과 영주 그리고 풍기에서는 오히려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이 더 많은 듯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버스 안쪽의 사람들은 굳이 손잡이를 힘들게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될 만큼 승객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버스 안쪽의 공기는 더욱 탁해 지면서 심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체력도 거의 바닥이 난데다가 심한 멀미 증세까지 있어서 풍기에 다다랐을 땐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멀미 증세가 있게 된 이후부터 뱃속은 계속 부글거리고 목구멍에서는 구토가 나올 듯 말듯 한 증세까지 겹치면서 기진맥진해 있던 저는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땐 요즘처럼 휴대가 간편한 비닐 봉투가 흔하지도 않았던 데다가 미처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어떻게 해서든 무조건 멀미를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구토를 한다는 건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어서 저는 죽기보다 더 싫었습니다.
바로 그때 옆에서 함께 서가던 큰형도 저보단 심해 보이진 않았지만 역시 차멀미 때문에 얼굴색이 온통 하얀 백지장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풍기를 도착할 때까지는 몹시 힘은 들었지만 구토를 잘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상북도 풍기읍을 지나면서 우려했던 현실이 코앞에 닥치고야 말았습니다.
풍기에서 단양까지 가려면 경사가 가파르고 험난한 죽령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야 했는데 이런 도로를 지날 땐 멀미를 하는 저 같은 사람을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고 맙니다.
죽령고개는 어찌나 구불거리면서 높고 지형이 험한지 풍기에서 정상까지 멀미를 꾹 참고 올라가는 시간만 근 3~40여 분 가까이 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또 다시 그만한 시간을 거꾸로 내려가야 합니다.
버스는 마치 계곡의 낭떠러지 아래로 금방이라도 곤두박질 칠 것 같다가도 다시 산 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나오기를 여러 수도 없이 반복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꼭 붙잡은 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멀미가 무척 심한 저도 이를 악물며 끝까지 참아 내려고 죽을힘을 다해서 버텨내느라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면서 빠르게 내려가는 버스는 뱃속 내용물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 올라와서 기진맥진해 있는 저의 괴로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잠시도 쉴 틈을 주질 않고 더욱 심하게 뒤뚱거리며 내달렸습니다.
머리까지 빙글거리며 하늘이 돌기 시작하던 저는 이제 더는 멀미를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며 구토를 참아 내려고 해도 목구멍으로 자꾸만 이물질이 조금씩 넘어오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억지로 삼키길 몇 차례 시도를 했으나 그때마다 가스가 가득 들어찬 저의 더부룩한 뱃속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았고 누가 손가락으로 배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곧 터질 것 같이 빵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도 이제나 저제나 구불거리는 산길이 어서 빨리 끝나길 기다렸던 저의 바람과는 달리 돌고 도는 고개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바깥 풍경을 보아서는 버스가 이제 죽령고개를 거의 다 내려간 것 같긴 했는데도 휘어진 산길의 끝없는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제가 약간은 방심을 해서 일까 버스가 고개를 빠르게 휘돌면서 차가 사정없이 한쪽으로 기우뚱 거릴 때 저로선 어떻게 대비를 해볼 새도 없이 입 밖으로 꾹 참았던 구토가 마구 쏟아져 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재빠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얼굴을 의자 밑쪽으로 최대한 숙였습니다.
그 구토의 압력은 어찌나 센지 마치 굵은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듯이 한꺼번에 뱃속의 모든 이물질이 다 품어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제 주변에 빼곡하게 붙어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은 순식간에 뒤로 한발씩 물러섰습니다.
그 바람에 버스가 단양의 버스터미널에 도착 할때까지 오히려 넓은 공간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오는 대여섯 시간동안 멀미를 참아오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토를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머리도 맑아지고 뱃속까지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책 없이 마구 쏟아낸 오물과 심한 악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어디 옆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 있던 어느 누구도 저에게 더럽다거나 냄새가 나서 못살겠다면서 눈치를 주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치 저의 그 답답했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기라도 한듯이 말입니다.
해마다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저는 35년 전 콩나물시루 같이 복잡한 귀성버스 안의 풍경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땐 제가 너무 어렸었고 경황이 없어서 함께 버스를 타고 가셨던 승객들과 기사님에게 죄송스럽다는 말씀조차 드리지 못하고 온 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늦었지만 모두들 행복한 추석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끌고온글 미디어다음에서)
내가 운전하면 안하는데
다른사람이 운전하고 가는 차 타면 왜 멀미를 하는지
알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