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그대는 이런 글을 읽고는 있는가.

by 김원일 posted Oct 09, 2015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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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먹칠하기와 거울삼기 / 박민희

등록 :2015-10-0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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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쟁에 패배한 일본에서 미국의 점령 통치가 시작됐을 때,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하게 한 체험 중 하나는 교과서 먹칠하기였다.

“새로운 교과서가 나올 때까지 학생들은 교사의 지도에 따라 낡은 교과서에 있는 군국주의나 국가주의를 찬양하는 문장, 혹은 무슨 이유에서든지 민주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는 문장 하나하나를 먹으로 검게 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먹칠 작업’은 이제까지 둘도 없이 신성하다고 생각한 가르침을 부정하는 의식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를 다룬 대표적 역사서로 꼽히는 존 다워의 <패배를 껴안고>에서 이 구절을 읽노라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초·중·고교를 다니며 국정 교과서를 줄줄 암기하고 대학에 입학한 뒤 교과서가 왜곡한 진실들을 깨닫게 되면서 느낀 배신감과 분노가 떠오른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5·16 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자 4·19 의거의 계승 발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할 정치, 사회 풍토를 조성하고자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같은 교과서 구절들에 몇번이고 힘껏 먹칠을 하고 싶다.

30~40년이 지나 우리 아이들은 먹칠해야 할 교과서로부터는 해방되었다고 안도했던 것은 보수세력의 집요함에 대한 지나치게 순진한 판단이었을까.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역사 뒤집기 집념이 결국 한국사 국정화 교과서란 괴물을 아이들에게 들이밀고 있다.

현재의 검정 교과서를 ‘좌편향’ ‘전교조’ 교과서로 몰아붙이며 국정화 총공세를 벌이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발언이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역사관을 꼭 닮아 있어 섬뜩하다. 조원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6일 국정감사 대책회의에서 “(현행 교과서에는) 자학의 역사관, 패배의 역사관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주입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했고, 지난달 2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자학의 역사관, 부정의 역사관은 절대 피해야 한다”고 했다.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고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도 ‘일본을 부당하게 폄하하는 자학사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태어났다. 일본 우익들은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고, 위안부 강제동원이나 난징대학살을 가르쳐 과거 국가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을 자학사관이라 비난했다. 바로 이들이 우익 교과서를 만들어냈고, 집단적 자위권을 담은 안보법제를 입법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을 되살려냈다.

한국 보수세력이 자학사관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다. 대한민국은 성공한 나라이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 때문에 성공했는데 이들의 잘못을 따지는 것은 자학사관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로 나아가면 일제의 식민통치도 조선을 근대화시킨 공이 있다고 재조명된다. 현재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인 친일세력의 정당화다.

한·일 보수세력이 함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철권 독재정치로 지배하는 당의 구호인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를 신조로 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일본 우익들도 감히 꺼내지 못한 국정화의 깃발을 한국 정치인들만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은 더욱 참담하다. 주권자인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한 대통령의 말들이 제왕적 명령으로 강행되고 견제의 힘이 점점 무기력해지는 우리 사회의 현실도 아프다.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자치통감> <동국통감> 등 동아시아 전통 역사서들은 거울 감(鑑)을 제목에 넣어,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을 일깨워왔다. <중국철학사>를 “내 인생을 바꾼” 애독서로 자랑해온 대통령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퇴행적 역사관을 강요하기 전에 제발 역사의 거울에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 광기의 정치를 비춰보시길.

박민희 문화스포츠 에디터 minggu@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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