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신문 8489호> 상처투성이 한국사회

by 젊음 posted Oct 21, 2015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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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신문 8489호> 상처투성이 한국사회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5-02-26 (목) 11:36 btn_print.gif font_big.gif font_small.gif

상처투성이 한국사회


3546948934_be6ee688_0+C4AEB7B3-+C0CCBFE4이요섭 | 스텔렌보쉬대학교 대학원 성서 히브리어 전공 

아마 몇 년 된 것 같다. 어느 해부턴가 ‘힐링’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되어, 이젠 매우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요리에도 힐링의 양념이 쳐져 힐링 요리가 인기를 얻었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영화와 음악에도 힐링의 타이틀이 붙은 것도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입구에도 누군가를 위한 힐링 교실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교회 주보에도 힐링 예배가 이목을 끈 지 꽤 된 것 같다. 


필자가 살고 있는 이곳 남아공에선 힐링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이목을 끌지 않는데, 한국 사회에선 해를 거듭해도 힐링의 열풍이 식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한국인들의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이리 저리 멍든 곳이 치유되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과 요청을 묵과할 수 없었던 어떤 정치인은 가족과 사회가 스스로 힐링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저녁이 있는 삶’을 공약에 걸기도 하였다. 비록 그의 공약은 투표수로 외면 받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삶이 당연한 권리 중 하나임을 삶에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가장 작은 사회 단위인 가정이 한 끼 저녁 식사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보다 더 처절한 곳, 통째로 삶의 터전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곳에선 가족끼리의 저녁식사는 너무도 낭만적인 꿈일지도 모른다. 무고한 해고와 불공정한 거래, 박탈당한 기본 권리 등의 많은 요소들이 가정을 위협하고 있다. 이미 무너져 버린, 상처투성인 가정도 부지기수다.


경제대국 12위와 상관없이, 한국 사회는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힐링을 호소하는 병든 사회다. 이토록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 뭔가의 부족일 것이다. 마치 비타민D의 결핍이 뼈를 부실하게 만드는 것처럼, 중요한 뭔가의 결핍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힐링은 무엇이 결핍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한 후, 재발을 막는 것으로 완성된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영화나 음악, 요리, 심리치료 등으로 힐링을 제공한다고 하는데, 정확한 진단 없는 힐링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필자는 우리 사회 문제의 주된 원인이 정의의 결핍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가 없는 곳엔 법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자주 확인하지 않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정의가 “법의 바깥에서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자크 데리다)” 하더라도, 오늘날 같이 먼 거리에 있었던 때가 과연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필자는 이 거리감을 좁히는 일이 힐링보다 먼저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법과 정의가 같은 범주에서 이해되어야만 사회악에서 우리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 


구약 성경 아모스는 공법과 정의가 마치 강물처럼 흘려져야한다고 외친다. 한번만 그럴 것이 아니라, 미완료적 시상으로 계속 그러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에탄' (영원한)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했다. 즉, 영원히 흐르는 강물처럼 법과 정의는 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 쓰인 강(히. 나하르)은 와디가 아니다. 법과 정의는 나일강처럼 흘러야 한다. 우기 때 잠시 흐르다 건조한 때에 말라 버리는 와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동사의 미완료 시상이 보여주듯 꾸준해야 함을 그 언어가 잘 드러내고 있다. 


작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많은 이들이 힐링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가 던진 공감의 말 한 마디가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 권력을 가진 자보다 더 힘이 있었던 이유는 누구보다도 사회악 같은 것들로 상처 많이 입은 약자들에게 그가 정의의 사도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에 와서 한 말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외쳤고, 예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을 오늘날 다시 꺼내든 것뿐이다. 사회악에 익숙해진 종교 지도자들이 할 수 없었던 매우 평범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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