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정체

by 역사 posted Oct 22, 2015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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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는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
 
 
고정간첩 박정희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6년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에 입대 1946년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 대구10.1사건 때, 미군정하에 식량란에 시달리던 2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구미경찰서를 습격한 후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 및 무기탈취, 선산 면사무소 습격, 135가마 양곡 탈취, 선산 군청 습격, 선산 요인집들 파괴, 지원경찰에 쫒겨 도주 중, 경찰 총격에 사살당함, (10월 6일 오전) ...
1946년 사살당한 셋째 형 박상희에 뒤이어 남로당원이 됨(남로당 총책 이재복에 의해) 1948년 남로당 주도로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 군내 적색분자 색출작업 전개 체포된 남로당 총책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으로부터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이라고 지목되어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고정간첩' 박정희 체포 (11월11일)
사상논쟁'의 시작
1963년 10월 13일. 육군대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가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는 내용의 Right-pointing black triangle동아일보 호외 200만장 발행과 배포 윤보선 후보측 2개의 증거자료 제시.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과 1949년 2월 18일자 서울신문의 "박 후보가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사실을 소개한 기사" 자체적으로 입수한 '군사재판 관련 문건' "피고인은 단기 4279년(1946년) 7월경부터 4281년 (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사상논쟁 시작은,
당사자이자 사상논쟁의 불을 지핀 박정희 그였다.

 


미국정부의 극비문서 
박정희의 공산당 활동은 미국에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아래는 최근에 비밀해제가 된 문서내용입니다.

미 메릴랜드주 소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이 자료는 이제까지 나온 문서중 5.16 주체세력들의
좌익 전력을 가장 광범위하고 집요하게 추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수신 : 힐즈먼
발신 : 마샬 그린
주제 : 한국
본 건은 대한민국 군사정부 내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에 관한 그렉 헨더슨의 연구 초안입니다.
남한에서는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까지 남로당 최고 사령부가 활동했다.
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李重業)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기간(47년말-48년초) 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1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었고 박정희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잘못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김창룡 중위(나중에 중장으로 진급)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독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김창룡은 맹렬한 반공주의자로 일본군 시절에
헌병 사병을 지냈고, 그 자신 역시 육군 사관학교 제3기생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생도들에게
접근하는 수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광범위한 조사를 받고 김창룡 수사대의 주무기인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가 직접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00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그의 부하 장교들도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바로 조직 지도자(박정희)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폭로했다.
박정희에 대한 보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총장, 특히 G-2(정보국)의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으며, 그 후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를 G-2 분야의 문관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미었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에게 고문과 죽음을 안겨준 그의 성격 역시 드러났다.
음모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지만,
박정희는 그 음모를 주도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형 박상희는 대구 경북 남로당 총책으로 빨치산 활동 하다가 경찰에 쫒기다 결국 경찰 총에 맞아 뒈진다
참고로, 이 호외는 전량수거 폐기 되었다~!!



- by 국민이 주인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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