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지만 잘 모르는 윤봉길[스토리에 담은 우리 유물, 우리 사람4화]

by 근현대사 posted Nov 09,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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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에 담은 우리 유물, 우리 사람4화] 누구나 알지만 잘 모르는 윤봉길
 
누구나 알지만 잘 모르는 윤봉길

연재일 : 2015.11.09 by 이호석
충남 예산군 덕산 출신.
본명 윤우의. 파평 윤씨.
고려 명장 윤관의 후손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왕 생일 축하연에서 윤 의사는 중국주둔 제국주의 군대 지휘부를 일격에 처단했습니다.

거사 후 두 번째 폭탄을 던지려던 그를 일본 헌병들이 덮쳐 결국 격렬한 저항 끝에 체포됩니다. 윤 의사는 이후 중국과 일본으로 압송과 이감을 거듭하며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구타와 고문과 모멸을 당합니다.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하등의 남길 말이 없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시 외곽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윤 의사는 미간에 일본 헌병의 총을 맞습니다. 13분 뒤 그는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도 고통스럽게 절명했습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형무소의 쓰레기 하치장에 암매장됐습니다.

20151109094956271fwzt.png윤봉길 의사의 사형집행 장면.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지금 윤 의사의 의거는 알아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어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몇명이나 될까요.

윤 의사의 의거 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했다는 말.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윤 의사의 희생 이후 중국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임시정부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던 중국은 임시정부를 동맹국 정부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국부'라는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낸 4.19 혁명 이후 1962년에야 윤 의사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의거 이후로는 30년 만에, 해방 이후로는 17년 만에야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희생을 공식적으로 예우하고 기록한 셈입니다.

1928년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 그는 시집을 3권이나 낸 문학청년이었습니다. 꿈 많던 젊은 시절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분. 그는 이렇게 강렬했던 삶을 다하고 새벽의 별처럼 스러져갔습니다. 그의 나이 24살. 그는 원래 의사도 열사도 아닌 시인이었습니다.

윤 선생의 일생은 그 여정이 고스란히 식민지 청년의 깨달음과 그로 인한 고단한 삶과 투쟁의 길입니다.

그는 1919년의 3.1 혁명으로 최초로 민족의식에 눈뜹니다.

윤 선생은 한 해 전인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한 처지였으나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목격한 그는 학교에서의 교육이란 것이 황국 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식민지 노예교육임을 깨닫고 학교를 자퇴합니다.

그는 이후 한학공부에 몰두하면서 특히 1921년에는 유학자인 성주록이 열었던 오치서숙이란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을 배웁니다. 1928년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에 그는 <오추> <옥수> <임추> 등 시문집을 3권이나 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농민계몽운동에 적극 뛰어듭니다. 자신의 집에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 힘썼고 1928년에는 '부흥원'이라는 운동단체를 만들어 증산운동, 토산품 애용, 부업 장려, 공동조합 등의 활동에 나섭니다. 또 수많은 독서회 강연회 등으로 농민들의 의식 향상을 위해 애썼습니다.

윤 의사에게 두 번째 깨달음을 준 것은 이흑룡이라는 독립운동가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만주 출생으로 대한독립군단이란 항일단체에서 국내에서 동지들을 규합하던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윤봉길 선생은 1929년 2월 부흥원의 낙성식을 치르는데 그 행사에서 <토끼와 여우>라는 아동학예회 연극이 공연됩니다. 우화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 강압통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 윤 선생의 활동을 마뜩잖게 보던 일제는 공연 다음날 윤 선생을 경찰주재소에 불러다 그의 농민계몽, 의식개조 활동에 대해 협박을 늘어놓습니다.

이 즈음 윤 선생에게 나타난 사람이 이흑룡이라는 사람입니다. 일제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계몽운동이 벽에 부딪히면서 윤 선생이 활동방향에 대한 새로운 전환을 고민하고 있을 때 이흑룡은 선생에게 상하이행을 권유합니다.

이흑룡은 윤 선생에게 '대한독립군단 특수공작원' 증명서를 보여 주고 당시 중국 등 국내외 독립운동 정세를 설명하는 한편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설득합니다.

윤 선생이 이흑룡을 처음 만난 그해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도 선생의 결심에 영향을 끼칩니다. 학생들의 투쟁을 통해서 농민계몽운동과 생활운동보다는 좀 더 직접적인 항일운동을 통한 민족의 독립이 결국 최종의 목표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모든 조선인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은 계몽운동과 같은 개혁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직접 투쟁을 통한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선생은 판단하게 됩니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윤 의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

1932년 선생의 상하이 의거는 이미 이때부터 준비되고 시작된 것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광주학생의거 다음해인 1930년 선생은 상하이로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22살의 나이였습니다. 부모님과 갓 태어난 아들, 만삭의 부인, 그리고 고향 마을 덕산의 동지들을 두고 죽음을 각오한 길을 떠나는 그의 심정은 이것이었습니다.

1930년 3월 6일 새벽 그가 길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입니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선생은 만주와 청도 등을 거쳐 1931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합니다. 1년 2개월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동북아 정세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고 있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납니다. 일본 관동군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침략한 사건으로 중국은 결국 만주에서 패퇴하고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웁니다.

만주에서 벌어진 중일 간의 전쟁으로 중국내 반일감정은 폭발하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1932년 초 일본인 승려들이 중국인들에게 상하이에서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항의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그해 1월 28일 해군육전대와 공군 전력을 상하이만에 상륙시키는 침략을 단행합니다. 만주에 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2차 침략이 시작된 것입니다.

중국군은 한 달간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3월 1일 18로군이 퇴각하면서 일본은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이른바 1차 상하이 사변입니다.

사변 이후 중일 간의 전쟁 뒷수습을 위해 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이 나서서 정전 협상을 추진합니다. 이들 나라와 중국, 일본은 몇 차례 협상 끝에 결국 4월 29일 최종 조인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날은 바로
운명의 윤 의사 거사일입니다

4월 29일 그날은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와 일본의 상하이 사변 전승축하식이 한꺼번에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중국으로선 치욕스런 국가적 수치였을 그 행사에서 윤 의사가 일본의 상하이 점령군 지휘부를 일격에 폭사시킨 것입니다.

만주와 상하이에서 연달아 일본에 패퇴한 중국으로선 윤 의사의 의거는 그야말로 통쾌하기 그지없는, 그리고 감사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를 이끌던 장개석이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윤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은 임시정부를 홀대하던 태도를 180도 바꿔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자금과 활동 지원을 비롯해 결국 조선과 중국 양국간의 본격적인 항일 공동전선이 구축된 것이 바로 윤 의사의 거사로부터 비롯됐습니다.

카이로 회담 등에서 중국이 미국 등을 설득해 조선의 독립 추진 조항을 합의문안에 포함시키게 만든 것도 결국 윤 의사의 업적입니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 독립운동 세력에 중국이라는 우군을 만들어준 윤 의사는 그러나 체포된 뒤 일제로부터 차마 인간으로서 감당 못할 혹독한 고문과 모멸을 당했습니다.

20151109100935072baqa.jpg거사 직후 연행당하는 윤봉길 의사. ⓒ국가보훈처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의거 한 달 뒤인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이때도 그는 상하이로 오게 된 이유를 묻는 검사의 물음에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독립지사로서의 굳센 기백을 떨칩니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어 결국 그해 마지막 12월 19일 가나자와의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형틀에 묶인 채 일본 헌병의 흉탄을 받고 순국합니다. 그의 나이 24세였습니다.

그는 거사 3일 전인 4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그의 가입 맹세는 이러했습니다.

"나는 적성(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20151109101229583ffen.png윤 의사의 한인애국단 가입선서와 사진.

김구 선생은 거사 당일 윤 의사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장면을 백범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기에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20151109101414516btlo.jpg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거사 전 교환한 시계. ⓒ국가보훈처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돈은 좀 가져가는 게 어떻겠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 군은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때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해방 뒤 1946년 6월 30일입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가나자와 형무소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발굴돼 고국으로 옮겨온 뒤 이날 김구 선생이 참석한 추도식을 거쳐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차장 밖으로 목이 메인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그들은 14년 뒤 이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20151109101631996xvuo.jpg윤봉길 생가를 찾은 김구 선생 (왼쪽 끝). 오른쪽 끝이 윤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 그 옆이 장남 윤종(1929-1984)

윤 의사의 의거로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중심기지가 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원래 1919년 3.1혁명 이후 각지의 민족지도자들이 해외에 세운 망명 정부로 출발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분명하게 명시해 놓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최근 일각에선 1948년 정부 수립일이 '건국절'이라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때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건국절 논란은 결국 '대한민국'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대한민국 헌법에는 3.1 혁명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3.1 혁명을 기원으로 임시정부가 성립한 그 순간을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국절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른바 객관적 진실이라며 식민지 과정에서 근대화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를 기반으로 해방 이후 공식적인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그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이승만 대통령조차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첫해의 모든 공문에 '건국 30년'이라고 썼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을까요.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의장 이승만은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다"라고 선언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다른 무엇보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됐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해방 전 그들의 투쟁을 마치 없던 일 취급을 하는 후세의 '객관적 사실주의자'들을 이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1919년 임시정부 헌법 제1조에 이미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던, 이미 그 시기부터 투철한 민주주의 의식을 갖고 있던 선열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후대들 때문에 윤봉길과 그의 동지들은 해방됐다는 조국에서도 여전히 외로운 건 아닐까요.

애국 선열들의 치열했던 독립투쟁 과정에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지금까지 계속 발전 해오고 있다는 이 간단명료하고 신성불가침의 정체성이 이제 와서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분들께 알려드려야 할지 그저 아득할 뿐입니다.

윤 의사가 거사 며칠전 고향의 어린 아들들에게 보낸 유언을 덧붙입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출처:storyfu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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