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와 목걸이부터 벗기려 하지마라
많은 기독교인들의 스텝은 뒤꼬여있다.
기독교의 최대화두와 그 정점은 당연 예수에게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교에 체화되어 가는 과정은 뒤바뀌어 있다.
소위 그들의 종교는 그 입문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가고 차단하는 부정적 역할로 시작되어진다.
입문의 첫걸음이 계율위주의 지키는 것부터 시작되어 그들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교의 진정함을 모르는 엇갈린 스텝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혀 제자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검을 쓰는 자 검으로 망할 것이지만
마지막까지도 베드로의 검을 거두게 하시지 않고 지켜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편견과 무지에 갇힌 그들의 영혼을 계몽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셨다.
이해와 확신이 우선시됨을 잘 알고 계셨다.
사람들은 예수교 신자의 징표를 그 계율과 실천에 익숙해지려는 쪽으로 그 방향을 잡고 있다.
경전의 예수를 인정하고 위대한 지도자 세상의 구주로 추앙하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냥 피상적인 앎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에서 파생된 예수문파는 종교가 아니다. 사회통념상 종교는 수양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예수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실증적인 탐구인 것이다. 이해와 발견에서 시작하는 영혼의 개벽인 것이다.
종교도 지겹고 교회도 지겨울 수 있지만 예수에 대한 인지는 힘과 즐거움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목걸이 반지를 먼저 벗기는 것은 금욕으로 끌어가는 길이다. 예수께로 안내되면 자의적 취사를 하게 될 것이다.
믿음이 있고 믿음이 좋다는 것은 착하고 헌신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를 찾은 사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예수가 언제 돌아올 것인가를 말하고 믿기 전에 먼저 지금의 예수를 인식해야만 한다.
주체에 대한 흐릿한 인식으로 그 때와 시기를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예수를 인지하는 자는 계율을 넘어서고 응용할만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피상적인 앎은 아무 결과 없는 허당 믿음이 될 것이다.
끝없는 사색과 연구로 영혼은 마취에서 깨어나 맑은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무한한 샘이신 예수를 경직된 종교의 덫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