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는 병원도 유대인 병원이 있고
그곳에는 의사분들도 또 여러 다른 부서에도 유대인들이 많다.
동네 공립 학교의 교사분도 차를 정비하는 유대인도 보게 된다.
학교 아이들도 많이 있고 그들은 자주 이스라엘로 여행 가는 것을 안다.
해마다 유대 명절이 언제 다가오는지 알 수 있는 것은
회당들 여기저기 명절 전에 미리 회당 자리를 구해 놓으라는 광고를 볼 때거나
주위에서 집 밖에 여기저기 초막들을 볼 때다. (어떤 초막은 현대식으로 알록달록한 불들도 켜둔다)
그리고 일반 공휴일이 아닌데도 학교가 노는 날이다.
유대인 회당들은 큰 것들도 많지만
작은 것들 그리고 기도처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새벽에도 무슨 공부를 하는지 큰 책을 투명한 비닐 가방에 넣고
회당을 나오는 사람들과 들어가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가끔 꼬맹이들도 아버지를 따라 회당을 가려고
눈 비비며 나오는 것을 보는데 명절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들의 성경책이 우리가 보는 구약 39권이라는 것을 알고서
유대인 서점을 찾아가 보니 책들이 엄청나다.
거의가 히브리어로 되어있어서 영어로 된 책이 어디 있느냐 물으면 찬밥 신세가 된다.
오래전 이스라엘로 유학하러 간 신학교 전도사님은
히브리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돌아왔다.
말을 좀 알아듣는 어떤 선교사님이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에서 어린아이 둘을 등에 업고
철야 기도하는 젊은 어머니의 기도를 옆에서 들었는데
밤새 찬양만 드리다 새벽이 되어
"하나님! 제 형편 아시죠?" 하고 기도를 마쳤다고 한다.
성경의 역대하를 읽으면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자세한 기록들이
여기저기 책들에 기록이 되어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구절들을 자주 본다.
그 구절에 명시된 책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들이 있을까?
성경에는 여러 왕에 대해 많으면 두어 장, 대개는 몇 구절들만 전해질 뿐이다.
예수님도 지키셨던 그 명절들과, 읽으셨던 책들이
오늘 유대인들에게 여전한 현실이다.
임진왜란 전의 승정원일기가 전쟁으로 소실되고
그 후에 남은 일기가 20년 전부터 번역이 되어 앞으로 50년 후에 번역이 끝난다고 한다.
그 양이 엄청나다고 한다. (2억 4300만자)
조선 왕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기록했던 비서들의 책이다.
지금 한류 문화를 이끄는 드라마와 영화들의 소재가
번역이 끝난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 것들이 많은데
앞으로 승정원일기가 나오면 더 많은 소재가 나올 것이라 한다.
구약 성경의 낱말들을 모아 놓은 사전에 8,000개가 넘는 단어가 있다.
그 말들은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과 다른 고전어 들이다.
고등학교 때 고전 국어 시간에 옛날 한글 말을 배울 때
읽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중국 사람들이 쓰는 글도 우리가 보는 한문과 다르고
이전 한문에 쓰였던 글자들을 축소 시켜 사용해서
그들도 옛날 한문을 배워야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한다.
조선 허난설헌의 유고 시집이
그 당시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로 발간이 되어
중국 황제도 그 책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으로 갔던 조선의 학자들은 통역관이 아니어도
그들과 서로 앉아 글을 주고받으며 깊은 소통을 했다고 한다.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남겨진 시가 1,700 여수인데
어느 대학에서 그 시어들을 모아 20년이 걸려 인터넷으로 사전을 만들었다.
그 숫자가 8,000여 개가 조금 넘는데
당시 그분이 참조하던 영어 사전은 70,000단어라 한다.
가끔 목사님으로부터 설교 시간에 성경의 한 책이 모두 몇 단어로 되어있다고 하거나
예수님의 설교가 몇 단어로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나
장로교 신학자들이 캘빈의 기독교강요가 22만 단어로 되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 책이 중요함으로 그 단어들을 헤아린다는 생각을 한다.
교회 앞자리에 주로 앉는 청각 장애인분들은 수화로 예배를 드린다.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가끔 수화로 이 말이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한 단어가 나오면
수화 통역자에게 묻는 경우가 있다. (그분은 수화를 좀 아시니까 물을 것이다.)
그럴 경우 설교가 잠시 중단이 되지만 모두 당연히 여긴다.
그런데 수화도 나라별로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 놀랐다.
교회 뒷자리에 앉는 시각 장애 교우는 찬미를 부를 때
외우지 못하는 곡은 반 박자가 늦다.
큰 스크린으로 보이는 그림들과 찬미가 가사를 보지 못하면 당연한 일이다.
불가리아에서 이민 오신 할머니는
성경은 불가리아어를 보시고 소통은 러시아어로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설교 예배와 서반아어로 진행되는 안교 공부 반에 그래도 열심히 참석한다.
교회에 러시아에서 오신 분이 있었다가 지금은 개척 교회로 가서 할머니와 소통할 사람이 없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언어 장애가 있다고
예배를 드리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신과의 소통이 이런 장애를 너머서 이루어질수 있다면
말과 보는 것과 감각을 넘는 소통은 어떤 식인지 묻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겪게 되는 2중 언어의 장애를 보면서
소통의 70%는 말이 아닌 동작이나 느낌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말도 동작도 되지 않는 상태의 소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시각 장애 분들에게 컴퓨터는 아직도 요원한 소통이다.
소리를 내어주는 컴퓨터가 그들에게 필요하다.
신이 우리와의 소통을 위해 로고스를 보내셨다.
그 로고스를 우리가 만졌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벽돌"이라는 단어를 예를 들며
동일한 말에 3가지 이상의 뜻을 놓고 우리는 말 놀이를 (game) 한다고 비트켄슈타인은 설명한다.
성경의 말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 오는지 물어 보게 된다.
시간의 강은 수천 년보다 더 길게 우리 앞을 흘러가고
그 강가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 걸리는 언어의 고기들을
먹기도 하고 몰라서 버리기도 하며 지나간다.
년전에 바닷가 가게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그려진 엽서를 사서
아무리 이리 저리 보아도 생소한 모양과 이름들이었다.
그것들을 외우고 익혀도
평생 그것들을 직접 볼 일도 먹어보지도 못할 것으로 여긴다.
뭍에서 자란 내가 아는 물고기를 손꼽아 보니 몇 개가 안 된다.
엽서에 그려진 것들은 모두 그럴듯하게 잘 생겼다.
가끔 들리는 과일 가게에서 일하는 Eddie를 만나
인사를 나눈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소통은 여전하다.
그가 아는 한국말들 보다 내가 아는 서반아어가 더 적다.
안식일도 일하는 그와 조용히 만나
꼭 해 주고 싶은 말과 그의 말을 듣는 것을 꿈꾼다.
방언을 몰라 생기는 소통의 답답함에도 나누어야 할 것들이 있다.
병원에는 말 못하는 분들이 있다.
목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숨을 쉬시는데
그분들은 말을 잘 알아도 소통이 힘들다.
그중에 제일 나은 방법은 종이에 ABCD가 쓰인 것을 들고
하나씩 짚어 가며 원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묻는 사람이 단어를 모르거나, 환자분이 단어가 틀리던지,
묻는 사람이 어디서 단어가 끝나는지 모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
이러한 방식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 둘만의 약속이 여러번 시행착오 속에서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문장은 간단해진다.
문법은 필요치 않다. 그러다 나중에는 첫 글자만 보고 단어를 유추해 나가며 말하지 않고 묻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말하는 입 모양을 보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그것이 더 힘들다.
그러기에 늘 바쁜 사람들이 종이를 들고 하나씩 물어가며 소통하기는 쉽지가 않다.
요시아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 찾았다는 그 책을 듣자 바로 옷을 찢었다.
그 책을 보면서 옷은 왜 찢고 무엇을 반성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성경을 보고 들어도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긴 시간의 강가에서 잠시 머물다
수 없이 많은 언어의 바다에서 감당하지 못할 양으로 낙심할 것은 없다.
다만 나에게 걸려진 것들을 감사하게 먹고
소중히 여기며 나누다 갈 것이다.
좋은 말씀입니다. 감사!
참고로, 요시야 왕 때 성전에서 발견됐다는 그 책은 많은 학자가 신명기 초본(12장~26장)이었을 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