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는 재수가 없나니....

by 당당 posted Nov 29, 2015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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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휴가 기간에 다른 가족과 함께 2박 3일 동안 캠프를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갈 곳이 적당치 않아서가 아니라 어디로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알다시피 서구 문화는 예약 문화이다. 내년도 행사에 '커피를 마실 것인가? 티를 마실 것인가?"까지 미리 예약을 해두는 것이 이들의 문화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이민생활을 하는 동포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한 마디로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르니까 장기적 전망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몇 달 뒤 혹은 몇 주 뒤에 휴가를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특히 이민 짬밥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욱 심하다. 그래서 모처럼 어느 곳을 가려고 결정을 해도 항상 뒤늦게 허둥대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러니 휴가철 한 주전에 캠프장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무모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저기 알아 본 결과 겨우 한 군데 예약이 가능한 곳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캠프장은 시드니 외곽을 벗어나서 바로 도착할 수 있는 한 시간 거리에 있었었다. 젊은 가족은 텐트를 치고 나이 먹은 우리 부부는 캐빈을 빌렸다. 캐빈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정으로 만원이었고 캠핑촌은 각종 자전거와 탈 것 등으로 분주 했다. 호주 사람들은 캠핑을 하면 차 뒤에 트롤리를 끌고 다닐 정도로 장비가 완벽한데 우리들이 가져온 장비들이 너무 초라했다.

그런데 캠핑장 분위기를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시내에서 가깝다보니 멀리 갈 수없는 가정들이 접근하기가 쉬워서 많이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오래있는 사람들은 냉장고까지 가져올 정도로 완벽한 장비를 갖추고 다녔다. 캠핑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휴가를 지내는 곳이었다.

가난의 문제는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자기의 가난에 대하여 불안해 하기가 쉽지만 호주 사회에서는 가난해도 안정적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물론 절대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사회보장 제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그런 제도가 없는 사회에서는 가난하면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안정된 가난'을 유지할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은 모자라는 돈 대신에 정신으로 떼우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웃음거리로 말하는 소위 ‘정신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왜 가난한 것일까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는 능력이 없는 분이 아니었는데 항상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대한극장, 명동 성모병원, 을지로 입구 한전건물, 지금 경향신문사로 쓰이고 있는 정동 구MBC 건물, 명동 유네스코회관 건물 등등의 건축에 참여했던 건설업자셨다. 그런데 4 남매를 고등학교도 못 마쳐 주셨다. 나만 고등학교 때부터 고학으로 공부했다. 결국 나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도 아니고 명색이 건설 사업가인 아버지의 정상적이지 않은 삶 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난이란 주제 때문에 최초로 정신적 테러를 당한 것은 대학생 때였다. 60년대 후반에는 여자 사람값이 싸서 모든 술집에 심지어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막걸리를 파는 대학가의 술집에도 접대부가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막걸리 집에서 판을 벌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늦게 왔다.

어디 갔다 왔느냐는 질문에 친구가 ‘도서관’이라고 하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거기? 뭐 잘해요?”라고 물었다. ‘관’ 자가 붙으니 도서관을 무슨 음식점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 순간은 웃고 넘어 갔지만 그 후 두고두고 슬픈 생각이 나는 기억이 되버렸다. 도서관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는 가난하기 때문에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싸구려 술집으로 흘러온 것이다.

그 후 가난에 대하여 보다 깊게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것은 한 군가 때문이었다. 거의 반세기전 훈련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수색에 있는 30 사단 정문에 집합을 했을 때였다. 군인으로서 첫 번째 동작이었던 정문에서 부대 안으로 행진을 하는 순간, 인솔 조교가 자연스럽게 “행군 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인천의 성냥 공장 아가씨! 하나, 둘, 셋, 넷!” 하고 구령을 붙였다.

아니? 나는 조교가 군가 한다고 했을 때 '언제 군가를 배웠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막 부대에 도착해서 아직 군복도 갈아입지 않는 상태였는데도 나만 빼놓고는 처음 들어 보는 노래를 다함께 부르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들어 보니 이건 군가가 아니고 가사가 요상한 것이었다.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 각 두 각/ 일 년에 열두 각/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XXX이 탔다네! XXX이 탔다네.

알고 보니 그 노래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1886년에 일본 사람들이 인천에서 성냥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성냥을 묻히는 일은 대개 인건비가 싼 나이 어린 가난한 집 여자 아이들이 주로 그 일을 맡아 했다고 한다. 당시 성냥은 오늘날처럼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한 통에 쌀 1되의 가격만큼의 고가여서 치마 밑에 감춰서라도 가지고 나올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그런데 최초의 성냥은 마찰성냥이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치마 밑에 감추고 걷는다고 해서 불이 붙을 정도로 허술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치마 밑에 불이 붙어'인 것이다.

시대가 만들어낸 가난한 민중 사이의 이야기를 성적으로 희화한 노래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시사해 주는 바가 컸다.  되새겨 보면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가난이 개인적인 탓이 아니라 시대 상황, 구조, 체제 때문일 수도 있다는 최초의 자각을 준 ‘오도송’인 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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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는 미스김 / 해병대군가

그 후 나에게 또 다시 ‘가난’에 대하여 강한 자극성으로 다가온 사건은 20여년 전에 세상을 들썩하게 만들었던 5인조 흉악범 조직 ‘지존파’ 사건이었다. 돈 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화장까지 해버리는 시설을 갖추어 놓고 범행을 저질렀던 무리들이었다. 그런데 잔혹했던 지존파 일당을 취조 했던 형사의 입에서 “불쌍한 놈들” 이라는 말이 나왔었다.

필설로 표현하기조차도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들을 취조한 형사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그 해답은 취조를 받는 도중에 범인 중의 한 명이 했다는 말 가운데서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에요” 그런가 하면 형사들이 해삼덮밥을 사주자 “이런 밥은 난생 처음 먹어 본다."고 했다고 한다. 나도 한 때는 지존파 같은 사회부적응자들이 느끼는 맹목적인 사회적인 불만, 이 사회에 대한 파괴적 욕구를 전적으로 공감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나는 그들과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라고 했는데 그 말은 틀렸다. ”가난한 사람은 재수가 없나니……. “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예수가 그것을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실제로 세상은 ‘부자가 행복하다.’라고 해야 맞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의 뜻은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꼭 그렇게 만들겠다.” 이런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용기를 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이 용기마저 잃었다면 그 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시드니에 고교 동창이 4명 사는데 네 명이 같이 만날 때면 주차장에 벤츠가 3대이고 토요다 코로라 소형차가 한 대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통장의 돈은 그들 보다 적겠지만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미국 동부에 흩어져 있는 아미쉬 공동체가 있다. 전기도 차도 없이 중세 시대처럼 살고 있는 이들은 군대 문제, 교육 문제 등등으로 가끔 미국 연방 정부와 법정 투쟁을 벌인다. 한번은 아미쉬들은 복지혜택을 받지 않겠다며 투쟁했고 연방정부는 받으라고 재촉하다가 결국에 대법원까지 가버렸다. 보통은 주지 못하겠다거나 더 받아야겠다고 싸우는데, 이건 완전히 반대의 케이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미쉬의 논리는 간단했다. 혜택을 받기 시작하면 의존력이 생기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동체적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에서는 아미쉬들의 손을 들어줬고 그들은 그렇다고해서 세금을 면제받는 것도 아닌데도 마치 무슨 독립이라도 쟁취한 양 환호했다. 더 잘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안정적 가난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당당뉴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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