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가.

by 김원일 posted Dec 18, 2015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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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재난, 세월호, 애도 / 문강형준

등록 :2015-12-1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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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재난의 시대’다. 재난은 세계화되어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곧바로 당도한다. 원자력발전소 폭발, 테러리즘, 금융위기 등에는 사실상 국경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을 숙주로 하는 재난의 가능성 역시 상존한다. 남북한의 위기는 한국을 넘어 동남아, 세계 전체의 위험요소이다. 각 지역의 공장에서는 이따금씩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서울의 지하철은 빈번히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촘촘하게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아주 작은 충격파만 생겨도 거대한 격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난은 상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애도’라는 정동(情動·affect)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말하고 있듯이 상실과 슬픔에서 기인하는 애도는 대상과의 기억으로 인해 유발되는 심리적 고통을 일컫는다. 하지만 애도의 고통이 심리적 차원에서만 끝나지는 않는다. 애도의 행위가 죽음을 만들어낸 거대한 질서를 인식하게 될 때, 애도는 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투쟁으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듯, “애도는 자신이 겪은 상실에 의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일어난다.” 이때, 이 ‘바뀜’, ‘전환’을 만들어내는 애도는 석연치 않은 죽음의 이면을 캐내려는, 밝히려는 행동을 가리키는 이름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애도는 개인의 슬픔을 지칭하지만 언제든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가진 정동이다.

애도라는 정동이 정치적 행동의 성격을 가지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희생자가 눈에 보여야 하는 가시성, 죽음을 유발한 원인에 관한 책임소재의 확정, 마지막으로 상실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할 제도적 변화의 요청이 그것이다. 재난으로 인한 국민적 애도는 이렇게, 슬픔을 관통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할 기회를 열어젖히는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된다. 세월호 사건을 국가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 요소 중 오직 한 가지, 곧 ‘희생자의 가시성’만이 드러났다. 책임소재의 확정도, 제도적 변화의 요청도 거리에서는 발화되고 있으나, 법과 행정의 영역에서는 축소되거나 사라졌다. 이번 청문회에서 드러났듯 책임은 선장과 선원들에게만 전가되는 중이고, 제도적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문화예술계에서는 세월호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연극과 공연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는 일들이 생겨나는 중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즉, 재난을 통한 애도의 정치적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게 언제나 문제다. 재난을 통한 애도의 정치 혹은 정치적 애도가 구조적 변화에 대한 요구와 급진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애도로 표상되는 ‘슬픔’의 정동이 ‘열정’, ‘분노’, ‘광신’과 같은 적극적인 정동을 동반해야만 한다. 세월호 직후, 세월호 1주기 때 그러한 결합이 있었지만, 쉽게 사라져갔다. 우리 시대는 재난도 만들어내지만 정동도 만들어낸다. 20세기 이후 정동은 언제나 관리되는 대상이었고, 인지능력 자체를 에너지원 삼아 작동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극도의 조증과 극도의 울증 사이를 번갈아 가며 인간을 소모시킨다. 기쁨, 행복, 긍정의 정동이 강조되고 강요될수록, 슬픔과 우울의 정동 역시 번창한다. 이 두 극단 모두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애도의 정치적 가능성이 정치적 불가능성과 얽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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