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시반경

by fallbaram. posted Dec 28, 2015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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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까지만 해도 한겨울에 때아닌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싸래기 눈이  지칠줄 모르고  내리고 있다.

싸래기 눈을 몰아치고 있는 바람도 예사롭지가 않다.

결국 점심을 먹고 차의 시동을 거는데 길은 짖눈개비로 범벅이 되어 미끄럽다.

모처럼 찾아온 큰아들이랑 맛이 특별한 잉글리쉬 토피라는 쵸콜렛을 사기위해

상점에 들렀는데 파킹이 마땅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차에 시동을 건채로 앉아 있었다.

오후 한시반경이다. 아들이 들어간 상점에서 한 할머니가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오륙십도 정도는 구푸려 진 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옅은 감색 외투에 모자를 늘러 써서 허리를 구푸리고 걷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살짝 얼은 길을 걷는다기 보다는 신발 바닥으로 밀고 다른발은 다시 그 위치로 끌고 가면서

마치 천천히 스케이트를 타는듯한 모습이다.

다소 애처롭게 보이기는 했지만 내 앞에 정차된 몇대의 차 중에서 할머니의 차가

있을 것이고 할머니는 운전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발걸음은 오히려 길 한복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한쪽발로 밀고간 만큼 다른 한쪽을 옮겨야 하기에 가로지른다고 보기 보다는

기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양쪽으로 차들이 줄을 서서 할머니가 길을 안전하게

건널 때 까지 기다려 준다. 아마도 건너편에 차를 세운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돌리려 하는데 그 할머니는 계속해서 건너편 길을 다시 가로 지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오분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생각에는 십분도 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가 길을 안전하게 건널 때 까지 기다려 준 차 한대가 할머니가 다시 가로지르기

시작하는 찻길로 접어들더니 할머니 앞에서 멈추어 선다.

그리고 차의 창문을 열고 할머니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는 할머니를 태우고 차가

떠났다. 아마도 한두블락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판단미숙으로

상점을 찾아 왔다가 악천후에 그만 지독하게 고생을 하실 뻔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에 살아 있다면 적어도 이십년 후에는 나도 저런 허리와 걸음으로 판단미숙으로

나선 길바닥에서 살얼음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교회일에나 성경 이야기엔 상당한 시간을 바치는 듯 해 보았지만

할머니를 태우고 간 그 차의 운전자 처럼 마치 본능적이라 할  만큼

민첩하게 손과 발이 되어주는

일에는 둔해져 있는 내 모습을 보게된다.


한시 삼십 오분에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면

나는 한시 사십분경에 오른쪽에 서게 될까 아니면 왼쪽에 서게 될까.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처럼 가운데 쯤에 설 수는 있을까?


어느쪽에 서기 위해서 이런일을 한다는 것이 좀 거시기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본능이 있다면 이런일은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을 까?


나에게 그런 본능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문제로다


볼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교회의 한 할머니가

연하장을 잘 받았노라고 전화를 걸어 왔다.

저녁 일곱시가 채 안된 시간이다.

저녁을 먹어면서 이미 겨울밤은 캄캄한데

예수님은 오늘도 오시지 않겠구나 하고

약간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수저를 놓았다.


사흘만 지나면 새로운 한해가 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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