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성서의 집안 싸움

by 김원일 posted Jan 31, 2016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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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7일 / 주현절 후 둘째 주일 / 마틴 루터 킹 기념 민권주일

 

너의 목소리가 들려

출애굽기 34:1-9

 

곽건용 목사

 

성서에도 토론과 논쟁이 있을까?

 

먼저 비디오 클립을 하나 잠시 보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클립은 올해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해서 경쟁하는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정책을 비교하는 비디오입니다.

 

어떻습니까? 부럽지 않습니까? 이런 토론문화가 부럽지 않은가 말입니다. 하기는 대한민국에서도 대통령 후보들이 토론회를 갖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2012년 말에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세 후보가 벌인 토론을 기억할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토론의 수준과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마 여기선 어렸을 때부터 토론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겠지요.

 

성서에도 이와 같은 토론과 논쟁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논쟁과 토론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있습니다. 성경에도 토론을 벌인 경우가 있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소돔 성을 두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벌인 토론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싹쓸이 멸절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하나님과 논쟁합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게 하나님의 정의냐고 말입니다. 의인은 상을 주고 악인은 벌을 주는 게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감히 하나님과 논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거기에 의인이 오십 명이 있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돌이키시겠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동의하자 그는 숫자를 열 명까지 낮춰놓지요. 결과는 하나님의 승리로 끝났지만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토론을 벌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셨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모세를 길고 긴 토론 끝에 결국 설득해서 내려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제로 모세를 내려 보내신 게 아니란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할 수만 있다면 내려가지 않으려는 모세를 하나님은 끈기 있게 설득하시어 결국은 내려 보내셨습니다. 이것 역시 토론과 논쟁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경우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에피소드지만 한 권의 책 전체가 토론과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욥기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욥기는 구약성서에서 논쟁의 대표적인 책입니다. 욥기는 책 전체가 토론이고 논쟁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거기 걸맞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그의 태도를 보고 본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왔던 친구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욥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들은 욥이 그럴만한 죄를 저질렀으니까 그와 같은 고통을 겪는 게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욥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격정적으로 토해냅니다. 둘 사이의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평행선을 긋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욥과 논쟁하시는데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욥을 압도하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관해서는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토론과 논쟁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서에는 위에서 든 예처럼 그리 어렵지 않게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줄 알게 되는 얘기들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토론과 논쟁의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람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말씀으로 남녀를 동시에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반면 2장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창조하셨고 그가 홀로 있는 게 좋지 않아서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갈빗대를 하나 취해서 하와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서 성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이 모순을 못 볼 리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조화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의 최종 편집자는 이 둘을 있는 그대로 놔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두 얘기가 각각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여러분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여러분 생의 의미와 목적이 뭔지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 생에 특별한 의미나 목적이 없고 단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기 생에 특별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믿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개인 아닌 전체 인류를 하나님이 왜,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는지, 그 본성과 의미가 뭔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어떤 천재도, 어떤 뛰어난 영적 지도자도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어려움이 성서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도 사람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콕 집어서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성서도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겁니다. 거기에는 한 가지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기원전 10세기의 신학자, 곧 창세기 2장을 쓴 신학자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머무는 동안엔 만물의 영장일지 몰라도 그것이 떠나가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약하고 허무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반면 기원전 6세기 또는 5세기 바빌론 포로기의 어떤 신학자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서 창조의 정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분명 일종의 토론이요 논쟁입니다. 토론자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장소에 있었지만 그들은 시공을 초월해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있는 겁니다.

 

논쟁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

 

성서는 이렇듯 서로 다른 의견들이 만나서 뜨겁게 토론하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책입니다. 성서에는 하나의 일률적이고 통일된 목소리마 있는 게 아닙니다. 성서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책입니다. 그것들이 만나서 서로 협조하고 공통점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계속해서 갈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토론에 가담한 다양한 의견들이 때로는 너무도 달라서 ‘신사적으로’ 부드럽게 상대의 의견을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의 견해를 날카롭고 격정적으로 공격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듯 성서에서 전개되는 토론과 논쟁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두 가지 주제가 가장 두드러집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기로에 놓였을 때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중에서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했을 때가 대표적입니다. 한편에는 이젠 왕을 세울 때가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은 야훼 하나님밖에 없다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행위는 야훼의 왕권을 부정하는 짓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시간 관계상 못하는데 사무엘서를 잘 읽어보면 그들이 이 문제를 두고 얼마나 치열하게 논쟁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알 수 있다면 그 분이 무슨 하나님인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 그렇게 믿을까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해서 호주머니 까뒤집듯 그렇게 드러내셨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언어와 사람의 언어 사이엔 크나큰 괴리가 있어서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줬다고 해도 사람이 그걸 다 알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언어와 생각은 하나님이란 신비하고 거대한 분을 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특별히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 본래 그런 겁니다. 우리 그릇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자괴감 가질 필요 없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얘기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는 상호보완적인 얘기도 있지만 갈등하고 상충되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은 극히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자가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말입니다. 자기가 만진 곳이 극히 작은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큰소리치는 격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지식이 얼마나 부분적이고 보잘것없는지를 깨닫는 것과 통합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 얘기를 이토록 길게 한 이유는 성서에는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만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서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음악에 비유하면 독주나 독창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나 합창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 우선적으로 이 사실을 아는 게 것이 중요합니다.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악기 소리가 어울려 화음을 이룹니다. 화음이 이뤄지지 않은 음악을 듣기는 매우 괴롭습니다. 그런데 음악에는 불협화음이란 게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음정 말입니다. 불협화음 전혀 없이 모든 음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좋은 음악은 아닙니다. 불협화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음악은 불협화음을 잘 이용하는 음악입니다.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도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구약성서 전체에 어울리지 않는 음정을 내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음악에 불협화음이 자주 등장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구약성서에도 불협화음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불협의 정도가 매우 강렬해서 자칫하면 전체 음악의 완성도를 위협할 정도인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물론 본문은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처벌이 따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 근거해서는 하나님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젖먹이까지 대량학살하시는 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대량학살을 저지르거나 그걸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과는 어울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구약성서의 연구자로서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하신 하나님에게 불협화음이 웬 말이냐고 생각했던 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것이 있다고 쳐도 어떻게 그걸 그냥 놔둘 수 있겠냐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고쳐서 좋은 화음을 만들든지 아니면 적어도 지나치게 튀지 않을 정도로는 손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제 생각과는 달리 불협화음들을 그대로 뒀습니다. 자칫하면 음악 전체를 망칠 수도 있는 것들을 그대로 놔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그 이유와 목적을 깨닫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성서가 불협화음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이유는 불협하는 각각의 소리에 독특한 의미가 있고 중요한 신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그것들을 없앴다가는 매우 중요한 신학을 잃어버리게 됨을 깨달은 겁니다. 곧 성서라는 오케스트라는 화음을 포기하고 개성을 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이라고 믿는 것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분으로 믿는 신앙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입니다. 둘 중 하나는 불협인 줄 알고 있지만 그걸 없앴다가는 중요한 신학을 잃어버리게 됨을 알고 그대로 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불협화음을 그대로 놔둔 이유가 뭔지를 밝혀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고 정했습니다.

 

어느 편이 화음이고 어느 편이 불협화음일까요? 하느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이라고 믿는 것이 화음이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이 불협화음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대량학살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화음이고 자비롭고 은혜로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불협화음일까요? 이렇게 말하면 ‘대량학살을 명하시는 하나님이 화음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말을!’이라고 화낼 분도 있겠지만 그것을 두고 볼 일입니다. 성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해석을 시도한 다음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거의 성경공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낯선 얘기여서 혼란스러운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내를 갖고 계속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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