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by 곰솔 posted Feb 10, 2016 Likes 0 Replie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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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수도권은 지방에서 유입되는 인구 이동으로 흥청거렸습니다. 물론 재림교인들은 그 이전까지의 종말론과 갈등이 있었습니다만, 자양 (연)합회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지도자들의 열정과 눈에 뛸 만큼의 소비경제 성장에 취했습니다.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을 크게 늘렸고, 신학과도 50명 정원에 30%를 더 늘려 65명이 입학하였습니다. 4년만에 신학생 수가 250명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전보다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졌지만 그 누구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80년대를 보내면서 90년대에 이르면, 작년 여름에 다시 등장했던 수도권 합회 분리가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만약 그 때 성공했다면 행정 지도자들의 숫자는 지금보다 두 배는 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90년대 흥청망청의 한국 경제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거품 경제의 후폭풍에 직면하게 됩니다. 1997-1998년의 외환위기가 그것입니다. 물론 일본의 장기침체는 21세기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당시의 H 합회장 그리고 나중에 연합회장은 십일조 5% 환급이라는 전무 그리고 후무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해석한다면, 1950년 전쟁 이후 30년이 지난 1980년부터 본격화된 <성장>이 거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침례자가 그 회기 동안에 나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균 출석생수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리고 노인들 중심의 시회적 약자들이 침례 대상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회기의 마지막인 2008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있었고, <교회연합>이란 대총회 제안에 편승해 구조개혁을 시도했습니다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2+4년이 또 흘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평출생은 더 줄었고 이젠 침례자도 줄었습니다. 대신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 한국 개신 교회도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최근의 혼란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극단적인 양극화는 극소수의 권력 집중 현상을 가져옵니다. 당연히 반발이 있지요. 하지만 그 반발은 또 다른 혼란으로 이어지면서 무력화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목회자 구조 조정과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교회들의 통폐합입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할까요?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결국 불황의 장기화로 이어지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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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엔 수많은 생략이 있습니다. 그리고 글쓴이조차 기득권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세력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특정인들을 공격할 의도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글은 대안을 위한 고민을 담은 것입니다.

거품 경제와 거품 성장. 부정적인 표현이 맞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산업경제는 구조적으로 순환체제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재림신앙)는 어디 즈음에 뿌리를 박아야 할까요? 당연히 거품쪽은 아닙니다. 

1945년 참혹한 세계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미국 경제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세계 경제는 그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점점 세계의 모든 신도시들이 미국을 닮아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이번 미국 대선에서 샌더스가 당선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양극화가 완화되면 좋겠습니다. 특히 차세대들의 숨통이 트이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1945년 이후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이제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임박한 종말론 그리고 최후 심판을 강조하는 재림교회는 무엇을 강조하면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까요? 대총회 보수주의는 정치적인 전술을 넘어서 참으로 재림교회를 마지막 교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박수와 함께 당선되고 그러나 온갖 루머에 시달리다 쓸쓸히 퇴장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보면서, 문제는 거품이 낳은 부실함을 먼저 고백하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재림신앙을 하는 성도들과 헌신적인 목회자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기문집>을 읽고 있습니다. 20세 전후의 헌신적인 청년들이 그 배경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생존을 위해 버둥거릴 뿐입니다. 금수저는 금수저끼리, 흙수저는 흙수저끼리... 교회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이상을 통해 <하늘 도성>에 올라가 구경을 했습니다. 충격적인 증언이지 않습니까? 당시엔 모두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랬습니다. 하지만 엘렌 화잇은 하늘을 구경하고 돌아와 간증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누가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삶에서 실천하며 소망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즘 히브리서를 평생 처음 읽고 있는데, 누군가 이렇게 간증을 적었더군요.

"학교 체육대회의 절정인 오래 달리기...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고 당연히 결승점에선 축하 순서가 대기하는... 물론 달리는 선수는 숨이 턱에 차지만, 예수님보다는 더 쉬운 경주! 그러니 무거운 것은 다 벗어던지고 완주하자." (톰 라이트의 히브리서 주석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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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장기불황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세대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사토리 세대입니다. 반면 지금까지도 전후 최고조의 경제성장 덕을 보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있습니다.

단언컨대, 당신들도 20년 안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솔로몬 성전을 추억하며 헤롯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물론 저도 그 끝자락에서 당신들을 섬기며 입에 풀칠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참 예배는 하늘에 원형이 있고 우리 모두는 그 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멜기세덱의 서열에 함께 서는 제사장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실제로 당신들의 성전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요.

작은 교회에서 몇 안 되는 신자들과 목회를 하지만, 더 이상 소비경제에 취하지 않는, 아니 취하기는 커녕 소비 자체에서 소외되는 자들 속에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소위 신흥 이단들이라 불리는 교회들에 청년들이 넘쳐나는 것은 바로 초기 기독교부터 반복되었던 현상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 역사의 주인공 대열에 서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만 말입니다. 


1844년 이후의 재림교회는 20대 청년 몇 명이 제정신 차리고, 실망한 신자들을 <하나님의 인치심>이란 기별로 불러모아, 1860년대에 조직화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아니라, 소비경제에서 소외된 청년들 중에 믿음을 가지고 하늘 도성을 향해 경주를 시작하는 소수의 청년들에게 있습니다.

소위 미래학자들은 작금의 혼란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그 사이에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이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그들의 예언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 중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금수저들 중에서도 말입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 한 번만에 쓴 글입니다. 오랜 만에 등장하여 글을 쓰려니 적응이 쉽지는 않습니다. 댓글들을 보면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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