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법칙
섬김은 사랑이다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l란다
우리는 고전 13장을 예사로이 읽고 노래 부르지만
그 안에서 시사하는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는지 그것이 법이 아닌
넘치는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야 한다
사랑이란
중세시대 피터 에이블라드라는 한 프랑스 수도승은 사랑이 뭔지를 기술했는데
그것을 도덕적 감화론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람에게 "도덕적 진보"를 낳는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고난의 본은 추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순종의 길을 계시할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사람이 개심하고, 회개하고, 보다 나은 상태를 열망하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견해이며, 소시니안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여기서 소시니안 주의자들이란 것은 16세기 경 “인간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성과 상식에 위배되는 교훈들을 배제하기 시작하였다”.고 가르친 무리들이다.
이들 이태리 인본주의자들은 삼위일체 사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영적 중생의 필요성 등을 거부하였다.
그들이 내 세운 것은 종교는 윤리라는 것이다
이 이론은 그리스도의 본에 의해 고무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은 유대인을 위하여 역사하지 않았다.
그들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들의 마음은 부드러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완악해 졌다. 그래서 이 이론은 죄 문제에 대하여 답을 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도 그리스도를 바라만 보면서 구원을 이루려해도 안되지만
무엇을 이루어서 구원을 이루려해도 안 된다
벧전 2:21-24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구원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어떤 느낌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반역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대결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와 인간 사이의 무너진 장벽을 헐고
그분이 인간의 모든 죄를 떠맡으시고 그 죄악의 결과를 혼자서 짊어지신
엄청난 사랑에 대하여 어슴푸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골고다에서만 하나님의 희생과 영원하신 사랑의 깊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여짐을 인식하고
그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확실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에서 성경대로란 말은 구약시대의 희생제도를 가르친다.
예수께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이다.
비록 드려진 것은 어린 양이나 소나 염소였지만
그 속에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짐승의 피가 있었다.
이방종교에서는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을 통해서 신들의 노여움을 진정시킨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재림교인들에게도 그런 개념의 죄사함의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을 달랜다는 말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서 죄사함을 얻는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마 27: 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 예수와 하나님과의 단절을 걱정하는 부르짖음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예수 자신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그분은 그렇게 인간의 죄를 짊어지셨지만 그분이 죽음의 문턱에 서 계실 때에
인간의 죄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를 절실히 깨달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소리 지른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가 인간의 죄로 인해서 끊어짐을 걱정할 만큼
인간의 원죄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화잇은 시대의 소망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망 3권 287쪽이다
“구세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가 없었다”
앞뒤가 완전히 막힌 문, 퇴로가 차단된 길, 바라보아도
앞은 한 치도 보이지 않는 길 그런 것들이었다.
본 훼퍼는 이런 것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선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안 계시는 것처럼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서야할
환난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환난이 문제가 아니라 매일 우리가 서야할 자리에서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감동적인 신앙이 있어야 자라나는 신앙이 된다
죄와 은혜
죄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런데 일부의 기독교인들은 죄가 매우 간단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오늘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해서 일상으로 죄라고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면 죄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가 하고 물으시겠지만
성경은 죄를 여러 가지로 구별한다.
시 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러 받은 죄 즉 성향이 있고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의 죄가 있는데
그 죄 가운데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등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런 반면에 성령을 거역하는 죄도 있다
이런 것들을 구별하면서 우리는 잊어버리고 또는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죄라고 하는 것이 심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죄를 위해서도 돌아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
우리가 가진 죄의 성향까지도 지시고 우리가 지을 미래의 죄까지도 담보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에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신 것이다. 죄는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악을 소멸시키시고 죄인을 정결케 하시려고 오셨다.
롬 3:25-26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는 바로 계산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너무 중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먼저 행하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는 이런 행위로서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다.
그리고 죄의 포로가 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는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죄는 심판되고 정죄된다.
그 죄로 영원히 죽어야 하고 다시는 어떤 것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고 준비하신 그분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온 우주는 이 거룩한 사랑을 깨달아 다시는 죄의 길을 걷지 않게 되고
인간의 모든 일이 끝나는 때 주님은 오셔서 회복된 나라를 상속받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섬기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누가 자신을 남을 위해 줄 것인가?
자기가 지은 인간 즉 피조물을 위해서 대속물로 준바 되었다고 말하는 종교가
기독교 외에 또 어디 있는가? 기독교는 그런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확신을 가지라고 하신다.
히 10:12-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영원히 온전케 된 죄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는 그의 의를 힘입어 하늘에 갈 것이다. 그것이 현실화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