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선악과를 따먹지 않아서
아직도 선악과가 그대로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잘 모르고 하는 "타락하지 않은 우주 거민들" 은 그런 세상에서 사나?
그런 세상의 선악과는 동산에 있을까
아니면 금고에 철통같은 보안 가운데 지켜지고 있을까?
창세기 3장. 선악과
참으로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듣고 생각하고 질문했던 이야기다.
늘 우리의 담론은 여기서 시작했다.
내가 속한 안교반의 반생들 대부분은
선악과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그렇게 일어난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너무도 황당하고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논리를 이리 비틀고 저리 굽히고 이렇게 건너 뛰고 저렇게 우겨야 하기 때문이다.
중학생들에게도 잘 이해 안되는 이야기가
보편타당한 진리 되기 어려울 것이다.
저 하늘에서 있었던 일처럼
아담과 하와는 반역했다는 것이 대쟁투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선택 때문에 모든 불행과 비극과 심지어 재해까지 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내 반생 중에 가장 보수적인 반생조차
'지진 홍수 동물들이 서로 잡아 먹는 일등등이
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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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을 불순종과 반역으로만 보면 어떻게 되는가?
이론과 신학을 따지는 것 보다
실제적 이야기를 해 보자.
소그룹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아이들의 '불순종' 을 반역으로 보는 것은
대쟁투적 시각이다.
화잇의 자녀교육관에 이런 것이 많다.
새자녀지도법 Child Guidance 이 가정들을 복되게 했나 아니면 힘들게 했나?
젊은 목사 부부가 아이들을 훈련시키느라고 고생이 많다.
왜 그게 잘 안되는지 힘들어하고 자책도 많이 한다.
"아이들이 말을 안듣는 것을 반역으로 보지 마세요.
아이들은 모두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부모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녀가 되고 싶어 하는 소원이 있어요.
항상 그걸 전제로 하고 의심하지 마세요.
아이들이 그렇게 못할 때
부모에게 도전하고 반역하고 못살게 굴려고 하는게 아니랍니다"
라고 조언해 주었다.
뭔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교회도 의견의 다름과 다양성을 불순종 내지는 반역으로 보고
교단도 그렇다.
"불순종으로 망한 우리 순종으로 회복하자"고
별것도 아닌 일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자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결국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우리 교과의 "반역과 구원" 이라는 제목
그리고 그 팍팍한 그림을 다시 보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들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아버지이신가
무엇이 어떻게 어디부터 잘못되었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좋은 글 올리시는 것, 잘 읽습니다. 저도 한 마디 보태고 싶어서 자판을 두드립니다.
<대쟁투> 사관은 성경을 오로지 '순종 vs. 불순종' 혹은 '충성 vs. 반역'의 역사로만 보는 율법주의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인간 의식발달사"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요.
그런 입장에서 하는 해석을 보시려면 Ken Wilber, <Up From Eden>을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선과 악을 이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열매인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아직 자기를 객관화해서 의식의 대상으로 의식하지 못하던 전이분법적 pre-personal 의식에서
이제 자기를 객관화해서 의식의 대상으로 의식하는 이분법적 personal 의식로 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죠.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 의식으로 자기를 의식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기의 벌거벗은 것을 의식하고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괴로움의 시작입니다.
자기의 모자람과 한계를 의식하며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른바 '원죄'라 할 수 있고...
이런 불완전하고 괴로운 상태를 극복하려는 것이 종교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 trans-personal consciousness에 이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세한 것은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수고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