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민' 김련희 "남한은 북한을 잘 모른다"

by 우물안 posted Mar 04, 2016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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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민' 김련희 "남한은 북한을 잘 모른다" 
4일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 간담회' 열어
16.03.05 10:26l최종 업데이트 16.03.05 10:26l

 부모와 딸을 평양에 두고 브로커한테 속아 남쪽으로 온 김련희(47)씨는 간혹 울먹이며 말했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김씨는 "이제는 살아서 평양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4일 저녁 천주교 마산교구청 회의실.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평양시민 심련희 송환 간담회'를 열었다. 지난 2월 24일부터 통일부 앞에서 1인시위를 시작한 김씨가 짬을 내서 마산에 왔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영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와 박창균 신부, 강마리아 수녀, 송명희(통일촌), 주연옥, 이종대, 최종엄씨 등이 참여했다. 김련희씨는 북녘을 떠나 중국을 거쳐 남녘까지 오게 된 여정을 이야기 하면서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간경화를 앓고 있었던 김씨는 친척집 방문을 위해 2011년 5월 중국을 여행했다. 그러다가 2개월 뒤 탈북자그룹에 합류한 그는 탈북브로커에 속아 남으로 오게 됐다. '하나원'에서 한 달가량 지내고 나온 김씨는 경산에 거주했다.

북에서 '양복사'였던 김씨는 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에 다녔고, 거기서 1등으로 수료했다. 두 차례 여권을 신청했지만 나오지 않다. 하는수 없이 밀항과 여권 조작을 계획했지만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간첩'이었다.

"정부 정착 지원금 절반, 브로커한테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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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시민 김련희.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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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탈북자 몇 명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휴대전화에 저장해 간첩활동을 했다며 경찰에 스스로 신고했고, 그녀는 2014년 7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대구구치소에 수감됐다. 10개월간 수감생활했던 김씨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다.

김씨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에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김씨는 통일부에 송환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김련희씨 송환모임'을 결성해 돕고 있다.

통일부는 김씨에 대해 현행범으로 송환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김씨는 유엔 인권위원회에 구제 요청을 해놓은 상태다. 김씨의 사연은 CNN과 싱가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김련희씨는 "평양시민, 대구시민 김련희입니다"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브로커에 속아 (남한에) 오게 됐다, 여권을 빼앗고 철창으로 잠궈 도망갈 수 없도록 했다"라며 "브로커한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비행기에서 내리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국정원에 가서 '나는 속아서 오게 됐고 부모와 딸이 있는 평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북으로 보내달라며 단식하기도 했다"라며 "그곳은 수용소 같았는데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나중에는 대한민국에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왔다"라고 덧붙였다.

"하나원에서 나오기 이틀 전에 개인 은행통장을 만들었고, 정부에서 정착금으로 600만원을 줬다. 그런데 그중 300만 원은 브로커 통장에 계좌이체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재판도 받아야 한다고 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법을 모르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10명이 함께 왔으니까 브로커는 3000만 원을 번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었다."

김씨는 대구에 살면서 경찰로부터 감시를 당한 사례도 소개했다. 자살 시도를 설명한 그녀는 "지금은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진보 인사와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이 손을 잡아줬다"라면서 "지금은 자살이 아니라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남쪽 사람들은 북에 대해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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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4일 저녁 천주교 마산교구청에서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 간담회'를 가졌는데, 김영만 6.15경남본부 상임대표와 김련희씨, 박창균 신부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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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씨는 북에 대해 제대로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는 사회주의 북에서 42년, 자본주의 남에서 5년을 살았다"라면서 "지금 남쪽 사람들은 북에 대해 잘 모른다"라고 진단했다.

"서울에 오니 국정원이 처음으로 데려간 곳이 63빌딩이었고, 서울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라고 하더라. 그 다음에 지하철을 구경시켜줬다. 그래서 평양 지하철 봤느냐고 말했다. 한 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서울에 와서 지하철에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놀랐다. 평양에서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주소를 물어 집에 데려다 준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는데, 그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노숙인이었다. 부모형제들이 있는데 왜 찾지 않는지, 한 마디로 놀랏다."

김련희씨가 남쪽 생활하면서 놀란 적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다음은 김씨의 주요 발언을 정리한 것.

"'평생 내집 마련'이란 말을 듣고 놀랬다. 내 집을 내가 마련해야 한다는 걸 몰랐다. 북에서는 결혼하면 국가에서 집을 주고, 부부 단 둘이 살면 작은 집이지만 부모를 모시겠다고 하면 더 큰 집을 준다."

"경찰과 차를 타고 가는데 여자한테 돈을 주었다. 통행료였다. 처음에는 아는 여자도 아닌데 왜 돈을 주나 싶었다. 길은 국가 소유인데 왜 돈을 내야 하나 싶었다. 길을 가는데 돈을 내라고 하니 신기했다."

"남쪽에서 '북에 대해 잘 안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북쪽 학교에 수영장 600개가 있다고 하니 뻥이라 하더라. 왜 600개 밖에 되지 않느냐 말이다. 북에서는 학교마다 수영장 하나씩 있다. 여기는 학교에 수영장이 없다 하고 학교에서 수영 수업도 안 한다고 하더라."

김련희씨는 남쪽에서 주부들이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다니는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학원에 다닌다. 학원비도 엄청나게 든다고 하더라. 엄마들이 무지하게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든 북이든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은 같다. 북에서는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다니는 일은 없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선생이 알아서 한다. 우리 딸과 아들이 무엇을 잘하는지는 선생들이 더 잘 안다. 만약에 아이가 음악에 재능이 있고 어떤 악기를 갖고 싶다고 하면 학교에서 악기를 사주고, 학생은 그 악기를 졸업할 때까지 자기 것으로 쓴다."

"제 남편은 군의관 출신으로 지금은 의사다. 북에서는 자기 것을 많이 희생하는 사람이 의사다. 피가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의사부터 자기 피를 먼저 뽑으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범죄가 많아서 변호사가 먹고 살고, 음식이 나쁘면 환자가 많아서 의사가 먹고 산다고 보면 된다. 북쪽은 예방의학이다. 구역을 정해서 담당주치의를 둔다. 주치의는 정기적으로 담당 구역을 돌면서 주민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안내한다. 그것이 예방의학이다."

김씨는 "지금도 어디서 태어나고 싶으냐고 물으면 열백 번 물어도 북에서 태어나고 싶다"라면서 "북쪽은 사람 사는 세상이고, 사람냄새 나는 세상이다, 남쪽은 무엇인가 불안하고 힘들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마전 광주 5·18묘역을 가봤다. 청춘을 바쳐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은 무엇일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청춘을 바쳐 희생했던 사람들을 빛내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 30년이 훨씬 지났는데 당시와 같은 눈물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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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4일 저녁 천주교 마산교구청에서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 간담회'를 가졌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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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씨는 일부 종합편성채널에서 탈북자들이 출연해 이야기하는 북쪽 실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안봤다. 탈북자들이 나온다고 해서 향수 생각도 나고 해서 봤던 적이 있다. 그런데 깜짝 놀랬다. 한 여자가 나와서 아이를 낳고, 유리조각으로 탯줄을 끊고,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치마에 아이를 감쌌다는 말을 하더라. 평양에는 조산원이 있다. 조산원 병실이 다 차면 초산이 힘들기에 초산은 무조건 들어간다. 초산인데 조산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아이를 낳았다면 그 담당 주치의는 감옥에 갈 일이다. 북쪽은 아이들 문제는 철저하다."

"인권은 세계 보편의 가치 ... 희망 잃지 말아야"

김련희씨는 "저의 송환문제도 중요하지만 남쪽 사람들이 북쪽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북쪽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북에서 10개 중에 한 개라도 잘하는 게 있으면 좋게 봐야 한다"라면서 "북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북은 괴물이 사는 데가 아니다, 손가락이 찔리면 피가 나는 사람들은 남이나 북이나 같다"라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질문과 격려의 말이 쏟아지기도 했다. 김영만 상임대표는 "마산 인근에 살았던 이인모 선생(비전향장기수 출신)이 1993년 북으로 갔다, 이전에 만나 보면 '내가 북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그런데 가셨다"라면서 "인권은 세계 보편의 가치다, 우리 사회도 요동치고 있으니 세상이 바뀔 때가 있을 것이다,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창균 신부는 "(김씨가) 송환을 바라고 있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그러한 힘을 모아 나갈 수 있어야 한다"라면서 "인권 차원에서 김련희씨가 송환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c)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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