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안식교, 안식: 안식교 목사님들 제발 이런 글 좀 읽고 설교 하삼. 무엇이 우리를 죽이는가.

by 김원일 posted Mar 28, 2016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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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과속 사회의 희생양 / 홍은전

등록 :2016-03-28 20:13수정 :2016-03-2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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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버지가 접촉사고를 냈다. 앞에 가던 택시가 급정거를 했지만 대응이 늦었다. “차도 늙고 사람도 늙어 그랬다”는 아버지에게 “안전거리를 지켰어야죠” 했더니 차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거 다 지키다간 욕먹기 십상이란다. “그런 걸 안 지키니까 사람이 죽잖아요.” 내 목소리가 떨리자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날은 큰언니와 형부의 기일이었다. 10년 전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던 트럭이 단속 카메라를 보고 급하게 속도를 줄이다가 차선을 넘어와 언니의 차와 부딪쳤다. 뒤이어 달려오던 두 대의 차가 다시 사고 현장을 들이받았다. 뉴스에서 감흥 없이 흘려보내던 불행이 난데없이 내 집 문을 두드렸던 밤. 두 사람은 결혼 후 한 달 만에 부모님을 뵈러 가던 길이었다.

아버지는 언니의 납골을 하지 않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자식이 산 자식의 짐이 되는 것도, 산 자식이 죽은 자식을 방치하는 것도 두려웠을 아버지는 죽은 딸을 당신 가슴속에 묻었다. “남의 인생까지 망칠 수는 없지.” 합의금으로 받은 돈을 남은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아버지가 말했다. “죽은 자식은 산 자식 거름이란다.” 분투하던 청춘들이 단숨에 죽어 사라졌는데 원망할 사람 하나 없었으므로 나는 그것이 두 사람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무고한 죽음을 받아들일 방법이 없었다.

그 죽음을 달리 바라보게 된 것은 세월호 참사 후였다. 나는 문득 내 옆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헤아려보다가 그 수가 적지 않음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건 각각의 운명으로 달려간 듯 보였던 그 죽음들을 하나하나 연결해가자 그것이 ‘헬조선’의 통계들과 무섭도록 일치했다는 것이다. 지인의 가족들이거나 가족의 지인들이었던 그들은 하나같이 젊었고, 병들어 천천히 죽어간 것이 아니라 자살과 산재와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다. 신문에서나 볼 법했던 죽음들이 일상 도처에 육박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새로 난 고속도로에서 무참히 차에 치여 죽는 고라니들처럼 이 폭주하는 사회의 희생양들임을 깨달았다.

“부모가 무능해서 그랬다.” 아버지의 회한이 고장난 시계처럼 10년째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나는 두 사람이 자동차가 아이보다 더 빨리 태어나는 사회의 운명을 끝내 피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촘촘하게 과속하는 사회에서 촘촘하게 고통이 전가된다. 제 속도를 고집하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욕먹기 십상이므로 사람들은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몰아붙인다. 더 이상 고통을 전가할 곳 없는 이들이 벼랑 끝에 매달려 있고 위로받지 못한 영혼들이 스스로 몸을 던진다. 죽음이 일상이 되었으나 책임을 추궁하는 일은 부질없다. 위로나 용서는 돈이 합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최저가로 남의 인생을 망치고도 지체 없이 시동을 건다. 산 사람은 달려야 한다.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 야학 교사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 야학 교사
4월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지난 25일 이들이 서울 마포대교를 막고 느릿느릿 행진을 이어가자, 30분 발이 묶인 이들이 30년간 갇혀 산 사람들을 향해 끔찍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그들은 십수년간 장애인들이 시종 저항해온 것이 바로 이 사회의 야만적 질주이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그 순간에도 자신들의 목숨이 이 고라니 같은 존재들에 의해 얼마간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폭주하는 사회에서 단속을 피하려는 누군가의 꼼수와 속도위반, 그리고 안전거리 미확보 따위가 운명적으로 만나는 날엔 고라니뿐만 아니라 조금 전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젊고 건장하고 무고한 사람들 또한 살아남을 가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 야학 교사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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