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서희씨가 당진 시내에서 아이를 안은 채 1인시위를 펼치고 있다. 정서희씨 제공
2014년 4월16일 이후, 국가는 국민에게 고통을 안겼다. 고통은 분노가 됐고, 분노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이렇게 무책임한 사회는 바로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반성 때문이었다. 세월호는 많은 이들을 바꿔놨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그날 딸을 낳은 한 주부는 난생처음 1인시위란 걸 했다. 한 여성은 세월호 유족들이 아른거려 카카오스토리에 자신의 아이들 사진을 차마 올릴 수 없었다고 한다. 사회 부조리가 득실거려도 애써 외면했던 회사원은 지하철역에서, 노란 리본이 흩날리는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사연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공통분모가 있었다. 이들의 인생은 세월호 참사 전과 후로 나뉘게 됐다는 것이다.
■“그날 태어난 아이가 내 인생을 바꿨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0분. 충남 당진의 한 병원에서 새 생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정서희씨(36)의 셋째 딸이다. 신생아실에 아기를 두고 병실에 누워 있던 정씨는 막내딸을 순산한 기쁨도 잠시. 침몰 중인 여객선을 비추는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채널을 돌려도 매한가지였다. 전원구조 보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오보로 밝혀지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남편은 TV를 꺼버렸다.
정씨는 아이를 키우고 살림만 하던 평범한 주부였다. 세월호 참사 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밤에는 인터넷으로 접한 단원고 학생들의 사연에 펑펑 울고, 아침에는 첫째와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빙그레 웃어야 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분개했다. 막내가 태어난 지 100일 되던 즈음 정씨는 당진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피켓을 들고 섰다. 막내를 안은 채였다. 지나가던 시민이 그에게 물었다. “왜 여기 서 있느냐”고. 정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답했다.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요.”
정씨는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1인시위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평안한 일상을 보내는 자신과 아이를 잃어 슬픔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 사이의 간극이었다. 정씨는 “전에는 정치나 사회 이슈에 전혀 관심 없었지만, 막내가 4월16일에 태어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20대 때 서울에서 지낸 정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던 주한 일본대사관 앞을 수없이 지나쳤다. 세월호 1인시위를 하면서 그때가 많이 생각났다는 정씨는 할머니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점을 후회하게 됐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정치와 사회 문제를 유심히 바라보게 됐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후원하는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눈을 돌리게 됐어요. 나중에 아이가 생일 축하 자리에서 다른 친구들의 아픔도 함께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1인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장미연씨가 당진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시민들로부터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 장미연씨 제공
■“참여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정씨를 동생이라고 부르는 장미연씨(37)는 정씨가 1인시위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동참하게 됐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던 차였다.
애초 장씨의 카카오스토리는 자신의 아이들 사진으로 도배돼 있었다. 하지만 참사 후에는 아이들을 찾지 못한 부모들한테 너무 미안한 마음에 아이들 사진 대신 세월호 관련 기사들을 올렸다. 장씨는 “슬픈 마음만 갖고 있기엔 너무 부족한 것 같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언론과 정부가 못미더워서 화가 너무 많이 나 당진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1인시위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장씨 역시 정씨처럼 1인시위가 처음이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은 많았지만 집회에 참석하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참여해야겠다는 생각도 못했다. 장씨는 “1인시위는 그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수창씨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김수창씨 제공
“기업이, 사회가 부조리로 가득해도 침묵만 해왔던 제 자신이 미웠어요. 죄의식 때문이랄까요.” 네트워크 엔지니어인 김수창씨(43)가 거리로 나선 이유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부터 지하철 역사로 향했다.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기 위해서다. 지금은 일주일에 3~4차례 퇴근 후 광화문광장에서 서명을 받는 자원봉사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정치나 사회문제에는 등을 돌린 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그를 바꿔놨다. 김씨는 “세월호 희생자가 일반 성인들뿐이었다면 이전처럼 외면했을 것”이라며 “17년 또는 18년밖에 살지 않은 아이들이,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를 시간도 없을 나이에 우리 어른들의 잘못으로 희생을 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2년이 지났지만 그의 아픔은 가시기는커녕 커지기만 했다. 방송 등 언론과 정부가 ‘거짓의 사실화’를 생생히 보여준 탓이라고 한다.
■“세상에 눈뜨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 여의도에서 산부인과를 경영하는 의사 고상현씨(45)는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조용히 살았다. 정치 문제엔 늘 귀를 열어뒀지만, 대학 시절처럼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 40대 중반이 되면서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며 여유로운 삶을 살려고 하던 차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이후 그는 달라졌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광장 대신 인터넷 공간을 택했다. 세월호 유가족으로부터 받은 사진과 동영상, 검찰 자료 등을 분석하거나 정리해 페이스북 등에 올린다. 온라인 홍보 역을 자처한 것이다.
고씨는 “세월호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나라가 못됐고 한국사회 모순 때문에 일이 터졌다라고 막연하게 비판만 하더라”며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관련 사실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진실의 힘을 믿는다”는 그는 방대한 세월호 관련 자료를 읽고 분석하는 데 매달리다보니 가족여행은 기약 없이 미뤄둔 상태다.

김미아씨가 서울 노원구 롯데백화점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미아씨 제공
김미아씨(47)는 요즘 서울 롯데백화점 노원점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시위 중이다. 2014년 6월 말 처음으로 광화문광장에 나간 후 새누리당 당사 앞에, 그리고 대법원 앞에도 섰다. 지난달 28일부터 이틀간 서울시청에서 열린 2차 세월호 청문회 때엔 시청 주변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었다. 그는 참사가 일어난 후 매일같이 울었다고 했다. “아이 키우는 부모라면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세월호 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 중 죽을 거라 생각한 아이는 없어요. 당연히 구조돼 나갈 수 있을 걸로 믿었을 텐데 결국….”
김씨는 쌍용차 사태 등 사회적 이슈는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행동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적은 없다. 한탄만 해왔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그를 거리로 나가게 했다. 김씨는 “정말 잠깐만 하려고 했는데 벌써 2년이 지났다”며 “그런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는데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나한테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관련 시위를 보기 드문 곳 중의 하나인 경북 구미에 사는 이루치아씨(49). 그는 이달 말 같은 성당 신도들과 함께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아 참배할 예정이다. 이씨가 제안한 것이다. 정치나 5·18광주민주화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지난해 1월부터 1인시위를 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이씨는 “같은 엄마로서 정말 못 견디겠더라”며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면서 거리 탄원서나 인터넷 청원서도 허투루 보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세월호가 가라앉을 당시 중학생이던 이씨의 둘째딸 역시 수학여행 중이었다. 큰딸은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동갑내기다.
진실을 인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