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님의,<다시 예언한 화잇 >반박글 - 이상구 박사님의 조사심판에 대한 빗나간 오해(2)

by 눈뜬장님 posted Jun 18, 2016 Likes 0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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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박사님께서 교회를 생각하시는 마음을 잘 압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교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밀한 연구를 하여 내놓았겠습니까? 매우 답답한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들 왜 둘러 엎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니(사 55:8)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려 알기위해 노력하고 부족한 제 자신을 살피며 잠잠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첫번째에 이어서 이박사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박사님의 글을 살펴보면 빗나가게 되신 원인이 구원의 확신을 너무 중요시하는 것과
성경에서 말씀한 구절의 과거시제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시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의미로 그 뜻을 이해해야 맞는데
그것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시고 적용시키려고 하시니 무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조사심판은 믿음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루터의 구원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루터가 숨질
순간에는 그의 구원이 결정되지 않았고 마침내 약 300년 후인 1844년부터 그의 구원여부를 놓고
속죄의 중보가 하늘 지성소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보혈을 믿은 루터나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죽을 때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숨지셨고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을 때에 모든 세상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피 흘리셔서 구원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이루신 것은 죄인들의 구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어린 양을 죽여서 지내는 속죄 제사의 과정만 간소화시키기 위하여 ‘의문의 율법’만을 폐하시고
나머지 십계명과 다른 도덕적 율법은 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들이 십자가를 받아드린 것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며, 남은 여생동안 ‘도덕법’들을 잘 순종해야 하며 최종적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주님께서 죄인들이 죽은 이후에 다시 율법에 대한 순종여부를 심사하는 조사심판을
거치고 마침내 재림하셨을 때에 죄인들이 부활하게 되는 순간이 와야만 죄인들은 마침내
 “아, 마침내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조사심판은 믿음을 파괴, 회개와 순종은 불가능하다.

정말 구원을 받는 것이 이렇게 조사심판을 통과 한 후에 결정지어지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동안, 또는 숨지기 전에는 구원의 확신이란 가질 수 없다.
결국 부활하기 전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셔서 자기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진리를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마음속의 원함을 말 하던가,
“나는 천국에 갈 예정이다”라는 추측만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안식일을 비롯하여 다른 도덕적 율법을 잘 지켜서 조사심판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속죄의 중보를 아버지께서 받아드리심에 달려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죄인들이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인은
미래에 결정될 구원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조사심판을 믿는 신앙으로는 변화(성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변화란 나를 변화시키는 힘,
곧 성령의 능력이 들어와서 변화시키는데 이 힘은 ‘믿음’, 곧 확신으로만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사심판을 믿는 이런 신앙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신앙이며 믿음이다. 이런 식의 믿음으로 하는 모든 순종이나 행함은 거짓 순종에 불과하다.
믿음이 없이는 모든 순종이란 구원을 받기 위한 위선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에 회개라는 조건이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위의 말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1. 죽을때에 구원의 확신을 못 가지면,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이고
2. 그렇다면, 그 말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한 구원을 못 이루신게 아니냐? 의 뜻인 것 같습니다.
3. 조사심판은 믿음을 파괴하고, 회개와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입니다.

1. 죽을때 내가 정말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면 불안할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장하시는 이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저는
오히려 이상합니다. 결과는 법정에서 재판이 끝나야 알 수 있는 것을 내가 불안해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거기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제 삶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혹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구원 못 받는데 대해서 조금이라도 불만이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시는 분임을 제가 확신하므로, 제가 구원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그분께서 저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하시든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판단에 기꺼이 승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디 감히 저같은 사람이 천국을 넘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마음에 그분을 조금이나마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족하며, 제가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때 도와 주신 것만으로도 족하며, 그분에게 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맡기고 살 수 있는 현재의 삶만으로도 족하며 감사한 일입니다. 그 이상의 바램은 저에게 있어서 욕심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분의 뜻대로 사는게 저의 소망이며,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그 자체에 평안과
행복과 건강이 있고, 최대의 삶의 가치가 있음을 알기때문에 그렇게 살고픈 것이지 구원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미완성의 삶을 살다가 죽을지라도, 천국이라는 구원의 보장이 없더라도, 저는 그게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께서 무조건적으로 저를 사랑하시고 저 또한 그렇게 화답하는 차원이라면, 구원의 확신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댓가를 바라거나 조건을 보고 하는게 아니니까요.

2.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의미를 어느 한쪽으로 국한시켜 이해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의 의미를 최종적 완성의 의미로만 이해하려고 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정말
최종적으로 마칠때  “다 이루었다!” 고 다시 한 번 외치시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속의 사업입니다.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었다!” 는 대속에 성공하심으로써 죄와의 싸움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확고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셨으므로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면 꼭 완전히 제압한 다음에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까요?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은 그럴지 몰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닙니다. 대속의 성공으로 판가름이 난 것입니다.
대속에 성공하고 못하고가 승패를 가르는 최대의 큰 일이였습니다. 그 다음은 이미 예견된거나 마찬가지지요.

대속이란 십자가에서의 구원은 죄인의 운명을 바꿔준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노비제도를 생각해 보십시요.
천민출신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좋아도 천민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천대와 멸시를 당하고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노예라는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어 죄로 인해 고통받고 온갖 불행과 쓰라림을 경험하면서도 죄의 신분에 묶여서
풀려나오지 못하고 그 본능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다가 죽어야(히 2:15)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를 대신 치루심으로 우리가 죄인의 신분에서 속량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모두가 얻은 구원이며 ,어느 죄인에게도 선물로써 값없이 주신바 된 십자가의 구원(엡 2:8)입니다.
그 속량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가능하게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롬 8:15 , 갈 4:6) 부르게 되었고, 우리가 죄의 신분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모든 사람은 값없이 죄의 신분으로부터 구원받아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제부터 하늘을 향한 구원의 여정이 시작된 셈입니다.

우리를,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죄의 족쇄를 풀게 해 주시고자 십자가의 위험을 무릅쓴
구주의 크나큰 사랑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의 안에 거하는 것 뿐입니다.
노비에서 풀어준 것도 인간은 목숨으로 갑고자 하는데 하물며 죄의 노예에서 풀어준 하나님의 은혜이리요.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죄의 흉악함과 악독함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3.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확신으로부터 나오므로 조사심판 교리와는
무관합니다. 조사심판은 우리가 한정된 은혜의 시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지표이며, 재림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일 뿐, 참된 믿음의 동기를 만드는 재료는 될 수 없습니다.
회개와 순종 역시 구원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고맙고 감사한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사심판은 우리에게 남은 때가 얼마 안됨을 인식시켜 줌으로써, 준비하게 해 주심에 감사해야겠지요.
하지만 내면의 동기는 아무도 모르므로 똑같은 일을 하고도 양과 염소로 분류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조사심판에는 감동, 감사, 기쁨이 없다.

진정한 믿음만이 참 순종을 마음속으로부터 솟아나게 한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에 “아!, 나에게 구원이 주어졌구나, 감사 하구나!”라고 기쁨과 감사에
넘쳐서 말할 수 있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회개와 순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심판을 믿으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조사심판이 있다면 회개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회개하기 전에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신
십자가의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된다. 회개와 순종과는 상관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십자가에서
이미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드리지 않은 것이며 은혜를
받지 않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는 것이고 성령 없이는 죄인이 회개할 수도 없기 때문에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순종이 없다면 그 믿음 역시 위선적인 믿음이다.
참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성령은 언제나 행함을 생산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사심판을 믿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진정한 믿음 없이 하는 순종과 회개는 진정한 순종도 회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조사심판을 믿으면 진정한 회개나 순종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다시 예언하여” 교회의 운명을 바꿀 새 기별이 필요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화잇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구원을 위한 모든 속죄의 과정을 완성하셨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셔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셨다. 그리하여 와그너를 통하여 “교회의 운명이 달린 증언”, 곧 진정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하나님께서 화잇에게 주신 것이다. 이 기별은 그야말로 1882년에
하나님께서 화잇에게 약속하셨던(초기 270) ‘교회의 운명이 달린 증언’이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 후에도 조사심판이라는 과정이 남아 있다고 가르쳐
왔던 화잇의 생각이 변하여 1844년에 예언하기 시작하여 1888년 이전까지 전했던 조사심판의
예언을 새롭게 수정하여 “다시 예언하게”(계 10:11)하시지 않으신다면 이 남은교회의 운명은 행위주의,
율법주의의 어둠에 속에 빠져서 그 장래가 그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해 내실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박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구원의 확신에 집착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만이 참 순종을 마음속으로부터 솟아나게 한다.'=맞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에
“아!, 나에게 구원이 주어졌구나, 감사 하구나!”라고 기쁨과 감사에 넘쳐서 말할 수 있는 믿음이다.

=>여기서부터는 저하고 다릅니다. 이박사님께서는 단어적인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시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말씀의 과거시제를 강조하시고, 부분적인 의미를 전체적으로 해석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단어적인 의미로 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과, 죄가 얼마나
무섭고 흉악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믿음과 순종과 회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의 신분에서 해방되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이고 축복이며, 가치있고 감사한
일인지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구원의 확신과는 관계없이 그 과정을
통해서 감사와 감동,자족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체험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의 화잇의 글을 보면 십자가를 받아드려 ‘의인’이 되었을지라도 과거의 잘못을 통곡하며 자복하는
기도가 아버지께 도달되지 않으면 구원을 주시지 않으신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풍기고 있다.
이런 글은 죄인이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드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영적상태에서
죄인이 회개와 순종을 할 수 있는 영적능력이 있다고 화잇이 오해한 상태에서
예언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들은(그 당시에 살아 있던)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들이 과거에 범한 잘못에 대하여 심히
통곡하였다. 나는 예수께서 그들이 드린 자복과 기도를 아버지께 올릴 때 향단에서 향연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향연이 올라가자 환한 빛이 예수와 시은소에 임하였다.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을 깨닫고 번민 가운데서 진지하게 기도한 자들은 축복을 받았고 그들의 얼굴은
희망과 기쁨으로 빛났다. (초기 256)

모든 영혼들의 운명은 이 (회개하고 순종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조사심판) 기별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있다.(초기 259)
다음 화잇의 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실제로 완성하신 때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신 때가 아니라, 1844년에 시작한 조사심판의 기간 동안에 회개와 순종을 잘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자격을 획득한 자들에게 인 치시는 일이 끝났을 때에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시는 때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자 나는 십계명이 들어 있는 법궤 앞에서 봉사하시던 예수께서 향로를 내던지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의 손을 치켜 들고 “다 이루었다”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엄숙하게 선포하실 때 모든 천사들은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던졌다.(초기 279)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을 때에는 그 누구의 죄도
사하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십자가의 가치,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자체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화잇이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가장 심각한 오류이다. 이 오류는 반드시 수정되어 “다시 예언하여야”한다. 계시록에도 화잇이
다니엘서의 예언을 다시 예언하여야 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계10:11 그때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과 왕들 앞에서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고 하더라.

그리고 1888년 화잇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깨닫고 난 후에 화잇이 비로소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라고 다시 예언하였다. 이로써 위의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조금 후에 화잇이
다시 예언한 글을 한꺼번에 열거할 것임)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을 때에는 그 누구의 죄도
사하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십자가의 가치,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자체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이 말씀은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아담이후 초림전까지 신앙한 사람은 믿음으로, 앞으로 예수께서 약속의 자손으로 오시어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자신들의 구세주가 될 것을 믿는 믿음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믿는 믿음의 표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십자가의 대속에 실패했더라면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었을 것(고전 15:14)입니다. 구약시대에, 오실 구세주를 믿고, 믿음 안에서 잠든 자들의 믿음이
예수의 승리의 부활로 효력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 이후로, 믿음으로 예수의 대속에 의지하여
자기의 죄를 사함받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다만, 공식적인 재판을 통하여 어떤 죄인의 죄가 어떻게 사하여졌고 용서함을 받아 최종적으로
영생을 얻을 자로 결정되는지, 공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절차가 남아 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조사심판이란 자체를 아주 몹쓸 것으로 정의하시는 이박사님의 판단은 잘못되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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