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스라엘
즉 육신의 이스라엘에겐 문자 즉 계명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성소라고 하는 그림도 주셨다.
교회라고 하는 새 이스라엘에겐
성육신을 보내주셨다.
계명과 율법이 영적 존재로 바뀌고
눈에 보이던 성전도 십자가인 영적 존재로 바뀌었다
그 영적 존재가 누구인지는 다 아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언약속에는 연대가 있다.
첫째날과 일곱째 날이 있고
2300 주야도 있고 사십일 사십년도 거기 있고
십분의 일도 거기 있고
칠분의 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도 거기 있다
그 모든 연대와 정해진 날들이 영적 존재속에서
다 이루었다로 증발하였다.
그 모든 연대들( 소위 크로노스라고 하는)이
하나님의 시간 영적 존재의 시간인 "때-카이로스" 속으로
삼킨바 되었다.
그 분의 존재가 영적으로 영원하고 또 다 이루었다의 기능이라면
이제 믿는 자에게 주신 두개의 "때" 를 믿고 기다릴 일이다.
그분은 그것을 "나의 때" 라고 입만 열면 말씀하셨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교회라고 상징하는 여자의 후손의 어미에게
"여자여 (교회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고 하면서
표상의 연대와 십자가의 때가 연관되어 있지만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다름을 말씀하셨다.
한번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때라는 말이다.
또 한번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즉 재림이다.
그 때는 이 땅의 시간이나 공간이 자리하지 않는다.
모든 연대가 그의 "때" 속으로 삼킨바 되었다.
개인에게 준 연대인
십분의 일은 십분의 십으로 변하고
칠분의 일인 안식일도 칠분의 칠인 날마다로 변하고
너의 모든 것이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선언 하셨다.
우리는 그 후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그분의 것이고
다만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로 변했다.
비록 움켜잡고 살지만...
역사속에 주신 모든 연대들 또한 영적인 시간 즉
"나의 때" 속으로 들어가서 아래와 같이 변했다.
더 이상의 연대가 없는
"모든 날의 마지막" 으로 바뀌었고
"속히 오리라" 고 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약속으로
바뀌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말씀을 꼭 그렇지 않다해도
내가 초림이요 내가 재림이다로 적용해 보아도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된다.
다음에는
그래서 이 땅에서 죽는 자도 딱 한 사람이고
사는 자도 딱 한사람이라고 하는
조사심판 보다 더 어지러운 이야기 하고 싶다.
왜그너와 죤스
데스몬드 포드는 재림교회의 보물들이었다.
요나의 잘못된 생각으로 모두 바다에 던져버린
그 아까운 짐처럼 말이다.
그 짐들이 무슨 죄인가?
선지자 요나의 잘못 깨달은 생각이 죄가 아니면?
또 한개의 짐을 바다에 빠뜨리려 하시는가?
혹시 조사심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행위의 조사가 아니라
너의 삶에 내가 맡겨놓은 것들을 얼마나 움켜쥐고
있느냐 일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행위에 관심이 없다.
그 분의 행위 그리고 그분의 소유에만
관심이 있다.
청지기 이야기가 그 이야기이다.
달란트의 이야기
포도원의 이야기
글고
므나의 이야기 모두가 다
그분의 때에 적용해야 할 이야기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