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염소 한마리 때문에

by fallbaram. posted Jul 29, 2016 Likes 0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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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에 올리신 글을 카스다에서 다시 올리셨고
카스다의 신학자로 보여지는 이 상락 목사가
대뜸 "천부당 만부당" 하다고 손사래를 쳤으며
우리 동네의 영웅이신 박님의 형님께서
그 가족들이 자신들과 맞서는 상대를 항하여
언제나 즐겨 쓰는 언어로
"궤변과 곡해의 극치" 라고 못질을 했습니다.

카스다의 신학자는 성경으로 풀어가는 도중에
적어도 세번에 걸쳐서 예신으로 뚜껑을 덮었습니다.
양쪽이 동의하는 증명이란 재림전에는 없겠지만
이 일이 박사님이 보신 것으로 기울어지면
예신의 힘도 기울어 질 위기에 서 있네요.

카스다 신학자의 글 중에는 이런 강조가 있습니다

"이 염소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죄의 장본인으로서 징벌을 받기 위해
자기 죄를 전가 받아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원흉 사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한 후에
진에 들어와야 했습니다(레 16:26).
대제사장도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처리한 후 목욕을 해야 했는데
그것은 희생제사가 아닌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처리하여
의식적으로 부정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레 16:21-24).  "

그러나 같은 성경에서 (레 16장27절과 28절) 염소를 광야로 보낸자나
번제단에 고기를 불사른 자나 다 같이 같은 정결의 행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다가 불사를 것이요
불사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지니라 

이렇게 되면 귀납적이든지 연역적이든지

옷을 물로 빨고 몸을 씻는 행위에 선행한 모든 과정은

"죄의 원흉 사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고 하는

카스다 신학자의 말대로 이것도 원흉 저것도 원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같은 행동이 두 염소의 각기 다른 처리의 과정에서 동일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 쪽의 것만을 강조하는 논리는 시작부터
올바르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면
아사셀의 행사가 시작되기전에 대제사장이 입는 옷이 세마포이고
그리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입게 합니다.

레 16장 4절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요한복음 19장에서 세마포 겉옷과 속옷을 입으셨는데 그  속옷을
제비뽑는 과정과 흡사하게 보입니다.

요 19장 23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시 22편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물로 씻음과 세마포는 둘다 속죄의 상징입니다.
그 행사가 끝이 나면 옷을 갈이 입는 일이 일어납니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거의 흡사한 장면이 요한복음 20장에서 재현됩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이제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해 보아야 합니다.

백스윙이라고 하는 표상적 전개속에서 어느 누구도
구주로 오시는 예수님 즉 메시야의 기능인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한개의 몸으로 그리고 한개의 사건으로
담당할 수 없어서 여러명이 여러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아들중에서도 메시야의 혈통은 유다에게서 나오지만
메시야의 기능은 요셉을 닮을 것을 표상한 것처럼.

데제사장의 핵심적 기능은 속죄입니다.
대속죄일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기능이 표상속에서 여러가지 기능으로
분리되어 나타나지만 십자가에선 단번에 해결하는 속죄로
귀결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구약의 여러가지 모양이나 의식이나 인물들의 것을 모아서
아들의 십자가에 촛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말세에 똑똑하고
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 당신의 핵심적 사역을 여러단계로 쪼개고
여러가지 제도로 흩어 버리고 그리고 그래야 진리인 것처럼
포장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당신이 희생제물이신
그런 역할처럼 당신이 죽임을 당하는 염소이며 동시에 당신이
떠나는 염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요?

호옥시 인간이 미칠 수 없는 지경으로 데려가서 놓아 버리는
그 염소가 살아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 가게 된 것이라고
해도 말이 될 수도 있네요.

이 땅에서 마친 지성소의 사건은 다시
하늘 성소의 뜰로 옮겨진 사건이라고 말하는
카스다 신학자의 궤변도 궤변과 곡해의 극치이고 천부당 만부당한
견해라고 사료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성막이요 동시에 하늘의 성막인 것을 모르고

성막을 성막으로 가두는 재림교회의 경찰들은?


허나
그깟 (?) 염소 한마리 때문에 아니 참새 한마리 때문에
십자가에 기스 낼 일 없으며 박사님의 목회에 재 뿌릴 일
있습니까?

제가 올린 이 글이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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