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옳다면 재림교인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 ! ?

by fallbaram. posted Aug 19, 2016 Likes 0 Replies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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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옳다면 재림교인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 ! ?


서론은 이것이다


쓰면서도 숨이  콱콱
읽으면서 목이 쾍쾍 막혀 질식할 것 같다.  



그리고 결론은 또 이것이다.


이것이 기준이라면 안식교인들은 구원을 못받는다. 왜냐면

첫째는 성경에 이런 말이 없기 때문에 틀리게 믿고 있으니 못 받는 것이고
둘째는 안식교인들 중에 화잇이 말한 위의 기준에 합격할 만큼 안식일 지키는 사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무겁다

성경위에 예신을 올려 놓기도,

그렇다고 아래에 내려 놓기도

너무 무겁다 


오늘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를 가르칠 것이다.

1장에서 빛이요 말씀이요 생명이요 은혜라고 소개한 그 존재가

2장에서 여섯이라는 육신을 채우는 숫자 다음으로 오는 숫자의 의미인 "나누어 주라" 고

하시는 영적인 말씀 즉 일곱번째의 말씀으로 오시고


3장에서 육신의 기록 (모세-광야의 주인)에서 영적 말씀인
빛과 말씀과 생명이요 또 은혜인 나 (가나안의 주인)에게로 전환하라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 는

기별을 주셨고


4장에서 전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여자의 여섯번째인 지금의 남자 (법적 남편이 아닌)를

거쳐서 다시 일곱번째의 남자로 아니 남편으로 찾아가는 일곱의 주인이신 어린양의 혼인잔치(?)

를 미리 보이시며


5장에서 다시 다섯행각아래에 누운 다섯행각이 고칠 수 없는 병자들을 고치시는
"빛이요 말씀이요 생명이요 은혜" 의 역사를 행사하셨는데


6장에서 그 모든 리허설들이 오병이어라고 하는 일곱의 숫자속에서

"나의 살과 나의 피를 마시는자마다" 다 살리라고 하는 십자가의 표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언제나 빛으로 시작하는 육의 창조와 영의 창조는 일곱이라고 하는 숫자속에서

전개되고 그 결론이 일곱의 날에 있다.


요한복음도 첫째날에 빛이요 말씀이요 생명이요 은혜가 소개되고

이튿날(1장 29절), 또 이튿날 (1장35절), 이튿날 (1장 43절) 이렇게 나흘이

지난후에 다시 사흘째 되던날 (일곱이 되는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열린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다-십자가의 표상)


복음은 빛으로 시작하지만 여러모양으로 반복하고 일곱이라고 하는 날을 향하여 자라나고

점진하고 점층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로 점철되고

우리는 이제 은혜의 왕국 즉 돌나라를 살아가는 성도가 된 것이다.


육신의 창조를 마치고 쉼에 들어간 날은 제칠일 안식일이 틀림이 없다.

그 안식일을 강조하고 심판하는 자가 모세이며 거기가 광야라고 하는 시내산이다.


요한복음에서 영의 구속을 마치고 성도들이 들어가는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히브리 4장에서

말한 여호수아의 안식이다. 거기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 즉 예수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하면서 안식일에 일을 하셨다. 구속의 일을 하시는 예수 (실로암)를 만나서

소경됨과 절룸발이 됨과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자들은 다시 안식일을 지켜서 스스로 흠이없는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러한 육신의 일을 쉬는 것을 여호수아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 지킬려고 하면 지키시라

말리지 않는다.

믿음으로 여호수아의 쉼에 들어간 자들 앞에서 제발 뻔데기 주름은 잡지 말기를 바란다.


다시 말한다.

이것이 기준이라면 안식교인들은 구원을 못받는다


첫째는 성경에 이런 말이 없기 때문에 틀리게 믿고 있으니 못 받는 것이고
둘째는 안식교인들 중에 화잇이 말한 위의 기준에 합격할 만큼 안식일 지키는 사람 없기  때문이다.


민초여

샤뱟샬롬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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