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그리고 신학
“신의 숨겨진 얼굴”(제럴드 슈뢰더)을 읽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구절을 하나 소개합니다
얼마 전 나는 미국 명문 대학교의 학장인 동료와 그 길을 함께 걸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가 마음에 있던 얘기를 꺼냈다
“우리 학교 물리학 과장이 자신은 모자를 두 개 쓴 꼴이라 하더군
주중 연구실에서는 과학의 모자를 쓰고 있다가
주말이면 교회에 가서 종교의 모자를 쓰는 격이니
신앙이 그를 이중적 사고방식에 갇히게 한다는 거야
피조물에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창조자를 믿으면서 동시에
자연의 예정된 법칙을 신봉하는 과학의 연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시절에는
물리학과 형이상학이 공존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당하다는 예로 사용했습니다
봐라 뉴턴 같은 위대한 과학자도 하나님을 신실히 믿지 않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시대는 물리적인 세계에서 설명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으므로 가능한 생각이었습니다
과학의 진보는 시대를 변혁시킵니다
사람의 세포 하나에 2m 길이의 DNA가 들어 있다는 것을 뉴턴이 알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겁니다
세포 하나의 크기가 20-30미크론 정도인데 그것을 10만분의 1로 압축을 해야
그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포가 수없이 많은 것으로 뇌가 조직됩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기억들을 사용하려면 압축된 나선이 풀려야 합니다
그것 풀다가 잘못 되면 나선이 훼손당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DNA를 풀이한 과학의 승리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합니다
단지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신묘막측이란 단어 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이 겪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특히 재림교회 생물학자들 천문학자들 그리고 고고학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6000년 설은 교회에서 사용하고
46만 년 설은 저들 학회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참 안 됐다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풀어먹고 사는 단체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이나 인간의 심성 가운데 숨겨져 있는 죄라는 것을 알고자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인 사랑을 말하면서 나와 다른 이에게는 절대로 사랑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랬고 여러분들도 그랬습니다
예언해석의 한 부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 딱지를 서슴없이 붙입니다
그래서 재림교회 신학은 예언해석이 주류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예언 해석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종잡을 수 없이 바뀌며 어제의 옳은 이야기가 오늘의 틀린 수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은 영원히 맞아야 하는 것으로 옷 입습니다
화잇 여사가 해석하지 않은 부분은 마음대로 재해석을 합니다
그러다가 화잇이 뭐라고 했다하면 그 해석은 거기서 고정해 버립니다
그 해석이 화잇이 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가 언급한 것은 예언해석으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신학과 과학의 한계가 어딜까요?
과학이 발견한 한계를 신학이 인정하지 않으면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대한 카톨릭의 태도처럼 되지 않을까요?
내가 보기에는 예수의 재림은 금방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한 100년쯤 더 지난 후에 이 교단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과학이 정의하는 우주와 종교가 정의하는 우주는 결코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과학자인 종교인들은 두 모자를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떤 면으로는 과학자가 안 되기를 잘 했다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6000년 설에 얽매인 신앙인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영원을 연구하는 학문이 고작 6000년에 얽매인다면
그게 오히려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들여 쓰신것 같으신데 과학과 신학의 결론이 어떻다는 것인지 모호하고 오리무중이군요. 제목은 웅장하지만 내용이 습작수준이고 너무 조악합니다.
결론을 알 수도 없는 흐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