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요일 새길교회에 가서 할 설교문을 여기 한 번 올려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기독교의 시작으로 유대교는 종말을 고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유대교는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발전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도 유대교가 그 이후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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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요한복음 17:21-23)
2011년 5월 22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오강남 교수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 교수)
본문: 요한복음 17장 21~23절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들어가면서
이처럼 다시 새길교회를 방문하여 여러 자매형제님들을 뵙고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새길교회에서도 몇 번 말씀드리고, 요즘 여기 저기 강연하면서도 이야기하는 주제 중 하나가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이 주제를 놓고 제가 2001년 서울대학교에 잠깐 와서 가르칠 때 가르친 일이 있는 제자 성해영 박사와 대담한 것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하는 제목입니다. 이제 한국 종교도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밟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늘도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고 심층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한 종교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선 표층과 심층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표층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무조건적 받아들이는 '믿음'을 강조한다면, 심층은 이런 것들을 스스로 깨닫는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입니까.
깨달음 중에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나의 영적 눈이 열려, 내 속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나와 하느님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면 나는 아무 것에도 꿀리지 않는 의연하고 늠름한 자유인의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내 이웃의 속에도 하느님이 계시고, 내 이웃도 하느님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나와 하느님과 내 이웃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자연히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표층 신앙은 지금의 나 중심주의적 신앙입니다. 경전의 글귀를 문자대로 믿고 따르면 지금의 내가 잘 되고 죽어서도 이 내가 어디에 가서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주된 관심입니다. 지난 주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천국은 없다"고 했다지만, 그가 부정한 것은 결국 이런 표층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인 셈입니다.
이처럼 심층적인 신앙으로 살아간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어느 종교에나 다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도 물론, 불교도, 도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유교, 유대교, 이슬람에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유대교 전통에서 이런 심층 종교를 가르친 분 한 분을 소개하여 종교가 가르치려는 깊은 뜻이 무엇인가,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이런 보편적인 종교적 가치가 무엇인가 되새겨 보는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바알 셈 토브(Baal Shem Tov, 1698~1760)
20세기 최고의 유대 사상가로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으로 유명한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를 아실 것입니다. 마틴 부버가 속했던 유대교 전통이 바로 근대 하시디즘인데, 그 근대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셈 토브(Baal Shem Tov, 1698~1760)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류영모, 함석헌 선생님 등 종교의 심층을 밝혀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약 50명을 소개하는 제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후에 나올 예정입니다.
18세기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의 도래를 열망하는 카발라 전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너무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메마르기만 한 랍비 전통에도 식상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실생활에서의 체험과 치유를 강조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근대 하시디즘입니다. 근대 하시디즘은 12~13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세 하시디즘과 이름은 같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이 근대 하시디즘 운동의 창시자가 바알 셈 토브였는데 ‘거룩한 이름의 큰 스승’이란 존칭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聖號大師’라 할까요.
그는 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이지만 그 당시 폴란드, 러시아 땅이기도 했던 오코피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후원자의 도움으로 자랐습니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잘하는 일은 학교에 결석하는 일뿐이었다고 합니다. 결석할 때마다 그는 숲에 들어가 자연과 함께 지내며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도저히 랍비가 될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의 후원자는 그에게 어린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 등의 잔심부름을 하게 했습니다. 놀랍게도 아이들이 그가 하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를 따랐습니다. 18세에 결혼했지만, 부인이 젊어서 죽자 이곳저곳에서 떠돌아다니며 잡일을 맡아 하다가 결국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소송사건이 있을 때면 그가 중재를 해주었는데, 천성이 착하고 정직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속을 이해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 때문에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이를 좋게 본 어느 돈 많은 사람이 자기 딸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사윗감으로 점찍었습니다. 이 사실을 딸에게 정식으로 알리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딸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와 결혼했습니다. 처남의 반대 때문에 말 한 필만을 물려받은 바알 셈은 부인과 함께 시골로 들어가 점토나 석회석을 캐어 동네로 가져다 파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연에 묻혀 일하는 것을 큰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숲 속에서 명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시골에서 농부들과 같이 지내면서 약초의 효험을 알게 되고, 약초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보고 자기의 가르침을 일반을 상대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류층 유대인들이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명성이 점점 커져가자 탈무드의 가르침을 받드는 랍비 전통의 유대인들이 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 당시 이름 있던 랍비나 유대인 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습니다.
바알 셈이 시작한 하시디즘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신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신 안에, 신이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신의 임재(臨在)나 현현(顯現)이라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을 하면 말에는 생명력이 있는데, 그 생명력이 바로 하느님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선할 뿐, 악 자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만물 속에 신의 불꽃이 있으므로 만물을 선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래 선하다는 일종의 서양식 ‘성선설性善說’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지금 상태가 어떠하든, 아무리 그들이 악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하기에 그들을 한결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듯 나를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이라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보편적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일종의 ‘겸애설兼愛說’을 가르친 셈이기도 합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바알 셈 자신도 사회에서 멸시당하고 천히 여겨지는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특히 여자들과 어울렸는데, 이 때문에 반대자들로부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는 “누구도 자기 이웃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누구나 하느님께서 주신 이해의 분량에 따라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른바 죄인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습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대신 그들 속에 있는 신적인 부분, 선한 부분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지었다는 죄도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무엇이라 보았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신에게 오르지 못할 정도로 타락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죄는 오로지 무지와 어리석음일 뿐이라 하였습니다.
만물 속에 살아 움직이는 신의 임재를 강조하는 범재신론적 신관에 입각해서 그는 우리 밖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신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고는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누려야 할 끊임없는 즐거움simcha의 원천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교에서 지나치게 강조하는 금식이나 참회 같은 금욕주의적 종교 형식이나 음울한 엄숙주의를 배격했습니다. 기도를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모든 종교적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성적인 헌신의 정신이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삶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삶의 두 기둥은 경배와 황홀경으로, 경배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신을 섬기는 것이고, 황홀경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신을 끌어안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알 셈이 가르친 하시디즘에서는 기도가 특별히 중요합니다. 물론 이때의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을 구하는 탄원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우주 안의 모든 것이 하나 됨을 인식하고, 하나됨을 회복하도록 촉진하는 힘입니다. 그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도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오인된 나 자신을 잊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면 황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인간은 신에게 완전히 흡입되므로 자신이나 자기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별적 존재를 잊어버린 상태를 ‘존재의 소멸the extinction of existence’이라 했습니다. 불교에서 ‘니르바나’가 ‘소멸’을 의미한다는 말을 상기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하고, 장자가 말하는 ‘내가 나를 여읨吾喪我’과도 비교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상태에 든 사람은 ‘자연과 시간과 생각을 초월’하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시디즘에서는 이런 상태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주문을 외우거나 춤을 추는 방법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바알 셈 토브가 시작한 하시디즘은 기본적으로 교리 체계나 윤리적 행위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는 종교운동이었습니다. 바알 셈 토브 이후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 하시디즘도 지성을 강조하는 정통 유대교의 가르침을 대량 흡수하여, 감정과 지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하바드 하시디즘Habad Hasidism’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바드’라는 이름은 지혜hokhmah와 이해binah와 지성daath이라는 히브리어 첫 글자를 조합한 것입니다. 종교에는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모두 조화롭게 균형잡혀 있어야 함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례를 통해 종교라는 것이 단순히 교리를 수납하거나 착한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 모두를 바쳐서 얻을 수 있는 전인적 체험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 밖에도 계실 뿐 아니라 내 속에도 계시는 하느님, 우리의 숨결에서, 심장의 박동에서, 아름다운 생각에서, 새봄에 돋아나는 잎새에서, 뺨을 간지럽게 하는 미풍에서, 쉼없이 출렁이는 물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해주시는 하느님, 우리도 이런 하느님을 느끼며 거기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삶을 이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
하느님,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당신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먼데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지만, 당신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 속에 살고 당신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다시 확인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자유와 자비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글이 아주 좋습니다.
한국에 있으면 새길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싶은데, 미국이라 아쉽군요.
제가 개인적으로 요즘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주제라서 더욱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교수님 책들을 사서 정독을 해 보아야 겠습니다. 다 읽지 못한 함석헌선생님의 책들과 김교신선생님의 책들을 다시 읽어 봐야 겠네요.
연배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좋은 친구를 만난듯이, 교수님의 글들을 여기서 볼수 있어서 참으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