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대로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내재하시는 하나님
빛의 파동과 입자 처럼이나 조화하기 힘든 이 개념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뉴에이지 (혹은 하시디즘) 은
전통적 기독교(유대교) 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생겨난
반동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주위에
뉴에이지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책을 우리 기도력 읽듯이 매일 읽는 사람들 있습니다.
한때는 이름으로나마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글쎄요
그들이 교회에서
친밀하고 내재하시는 하나님
용서와 자비와 용납의 하나님을 배우고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를 사랑, 용납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구태여 뉴에이지 언저리를 맴돌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제자님의 신앙도
초월과 내재의 하나님이 적당히 모자이크된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때로 그 이름이 달고 오는 예단 때문에
우리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무슨사상이다
저건 어떤 이즘이다
너는 무슨 주의라며?
저 사람 모모주의자야
이름 붙여 놓고 보면
그 칼라풀한 실체가
이름으로 인해 도매금으로 재단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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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시천주
어느 종교학자나
동학교인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아브라함 죠슈아 헤셸이 하시딕들에 대해 쓴 책이 한 권 있는데
제 어머니가 몇년 전에 심심하셔서 그 책을 읽으셨습니다.
참 좋은 책이다 많이 배웠다
그러시더군요.
신앙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패러독스를
무슨 무슨 신학적 용어나 철학적 정의를 들어 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저의 어머니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말 되게 설명해 주는 것을 듣고(읽고)
공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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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무리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뉴에지지와
율법주의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쁩니까?
우리가 우리 중의 율법주의에 대해 참고 관대하고
인내로 교육하고 성숙해지기를 기대하는 바로 그만큼만이라도
뉴에이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까요?
김주영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어제 바빠서 못 들어왔는데, 그 동안 제자님이 뉴에이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지요?
제가 제 제자와 한 대담을 가지고 엮은 책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하는 책에 뉴에이지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여기 퍼 올립니다. 좋은 생각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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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이에지 어떻게 볼 것인가?
성 - 심층 종교와 관련해서는 최근 등장한 현상으로는 뉴 에이지(New Age) 운동 같은 종교적 움직임도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뉴 에이지에 대해 제도권 종교의 반발도 적지는 않습니다만, 개인들이 직접 자신들의 영성을 구현하려는 사례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 - 북미학생들에게 종교적인가라고 물어보면 ‘나는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다’(I am not religious, but I am spiritual.)라는 답변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말은 표층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제도화된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고민을 해결할 수 없고, 표층종교를 벗어나 심층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을 영적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나타내는 겁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뉴 에이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뉴 에이지 그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마치 특정 종교가 좋다 나쁘다 라고 얘기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뉴 에이지는 사실 서양의 용어입니다. 서양에서 ‘뉴’(New)이지 동양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대적으로 뉴 에이지냐 혹은 올드 에이지(old age)냐 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표층이냐 심층이냐라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곳 한국의 제도종교는 뉴 에이지를 나쁜 것으로 매도해 놓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다가 이 이름을 붙이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런 태도는 종교적 매카시즘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비판하고 싶은 것에다가는 뉴 에이지라는 딱지를 붙이는 거지요.
성 - 선생님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제로 뉴 에이지 운동은 미국과 유럽 지역에서 이미 굳어버린 표층적인 종교에 반발해, 종교의 심층적인 차원을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도 종교 속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영성을 찾는다는 대안적인 시도로 새로운 종교적 움직임이 등장했는데요, 많은 기성 종교 교단들은 그런 맥락을 무시한 채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모두 싸잡아서 비판할 때 이 용어를 차용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어떤 종교가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은 건 아닌데 말이죠.
오 - 그리고 서양에서 뉴 에이지라고 하면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 전통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970년대에는 불교와 힌두교 강의를 개설하면 학생들이 강의실에 꽉 찹니다.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인도나 티베트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요, 요즈음에는 기독교의 심층적 차원을 다루는 수업에도 학생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기독교 전통 속에도 동양 종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심층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전통에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잊혀졌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하게 된 거죠. 이런 점에 주목하면 뉴 에이지가 단순히 동양 종교의 색채를 띤 것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자기 종교 전통 속에서 심층적 차원을 찾아내는 것을 뜻할 겁니다.
성 - 그러므로 뉴 에이지란 표층적인 것에 머물러 있던 상태에서 근원적인 뿌리를 찾아가는 움직임이라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런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현대에 들어서 개인들이 종교에 관해 풍부한 정보를 접하면서, 자신의 취향과 욕구에 맞는 종교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전과 달리 서구에서 종교 선택의 자유가 확대된 다는 점도 한 몫 하는 것 같구요. 그 점에서 뉴 에이지는 매우 현대적인 현상입니다.
오 - 뉴 에이지는 그야말로 맞춤형종교예요. 옛날에는 중국에서 태어나면 중국 음식만 먹게 되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중국 음식, 이태리 음식, 한국 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종교에서도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폴 니터(Paul Knitter)가 『붓다가 없이는 내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다’(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이라는 책을 냈는데, 불교를 알게 되면서 기독교의 심층적 차원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이하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