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에 대한 서평 하나가 있어서 퍼옵니다.
물론 책선전이라 보실 수도 있지만, 책의 내용을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 주므로
우리가 종교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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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에 이르면 서로 통한다 [2011-05-20]
어쩌다 시절이 이리 흘러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종교를 보는 시각이 옛날 같지 않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잘못 가고 있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라는 염려가 담겨 있다.
이전에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고
사람들은 의지할 곳으로 종교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을 오히려 종교라고 여길 정도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종교계의 모습이란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기업경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종교가 세간의 스승 되기를 그만두고
세간의 논리를 몸소 실천하며 세간보다 더 빠르게 세속화되어가는 속에서
어떤 이는 그런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세간에서와 다르지 않은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종교를 통한 새로 나기의 바람을 이룰 수 없는 것에 좌절하며 종교로부터 돌아선다.
이런 때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과 오강남 명예교수와
그를 통해 촉망 받는 종교학자로 성장한 서울대 성해영 교수가
신비체험과 연관된 종교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대담을 나눴다.
두 사람은 신비주의라는 특수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기도 하다.
사제간이면서 신구학자로 만난 두 사람은
오늘날 종교계가 보여주고 있는 여걸 가지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해부하고
종교계가 바로 서고 옳게 가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종교와 종교인이 함께 심층종교와 종교인으로 성장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다시 태어남’이고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심층종교란 표층종교에 대비되는 것으로
표층종교란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원리주의적인 종교를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와 자기 것을 중심에 세우고 남과 남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전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종교행태를 가리킨다.
*****
종교적 발달 과정은 ‘작은 나’가 죽고 ‘더 큰 세계관을 지닌 나’로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죽음과 재탄생을 거치면서 심층적인 체험을 통해 이타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교 전통의 경전이 말하는 것들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서로 사랑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며, 이타적인 인간이 되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만나게 됩니다.
-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중에서, 42쪽
‘하나만 아는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는 말과
‘더러운 물은 버려도 아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종교는 체험이지 설명이 아니다’라는 말과
‘불교가 있어서 기독교의 심층을 바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의 말과
‘절대적 확신은 무지한 자의 특권’이라는 말 들을 읽는 동안
종교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들을 깎고 다듬어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자리에서 오강남 교수에게 들었던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깊은 곳에서는 서로 통할 수 있다’는 말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떠올랐다.
A라는 사람이 알고 있는 자기 종교가 표피적인 것이고
그가 알고 있는 다른 종교가 표피적인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또 B라는 사람이 자기 종교에 대해 표피적으로 알고 있고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다른 종교가 표피적인 것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A와 B는 서로 표피적인 앎을 내세워 시비를 벌이고 있는 셈인 것이다.
겸손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내가 내게 맞는 종교를 선택한 것처럼
다른 누구도 그 자신에게 맞는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서로의 종교 안에서 바른 가르침을 좇아 바르게 사는 것이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말하는 데 종교의 본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느리게 내 걸음으로 가도 되고
남보다 조금 늦게 이뤄도 된다.
거듭해서 새로 나기 위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위해
종교 안에 머무는 모든 이의 모든 시간이 즐거울 수 있기 바란다.
더불어 나날이 새로 나고 거듭 나고 새사람 참사람이 될 수 있기 바란다.
안 해도 좋을 우스운 옛이야기 한 토막 덧붙인다.
한 달 전까지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던 여자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서 생판 모르는 아이처럼 눈도 마주쳐주지 않더니
옛날 함께 뛰놀았던 운동장에서 남녀학생들이 함께 모인 어느 날,
아직 어린 아이들이 남녀로 나뉘어 한 판 제대로 언쟁을 벌였다.
발단은 영어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남자중학교에서 ‘is’를 ‘이스’로 발음한다 배웠고
여자들은 여학교 선생님에게서 그 발음을 ‘이즈’로 배웠던 것인데
우리는 배운 바에 따라 서로의 확신을 굽히려 하지 않았고
‘우리 것이 맞고 너희 것은 틀렸다’면서 상대를 싸잡아 눈 아래로 깔아보며 싸웠다.
처음부터 승자가 있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지금은 만나면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싸우기는커녕 서로 배꼽을 잡고 웃는다.
종교를 보는 시각이 옛날 같지 않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잘못 가고 있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라는 염려가 담겨 있다.
이전에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고
사람들은 의지할 곳으로 종교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을 오히려 종교라고 여길 정도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종교계의 모습이란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기업경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종교가 세간의 스승 되기를 그만두고
세간의 논리를 몸소 실천하며 세간보다 더 빠르게 세속화되어가는 속에서
어떤 이는 그런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세간에서와 다르지 않은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종교를 통한 새로 나기의 바람을 이룰 수 없는 것에 좌절하며 종교로부터 돌아선다.
이런 때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과 오강남 명예교수와
그를 통해 촉망 받는 종교학자로 성장한 서울대 성해영 교수가
신비체험과 연관된 종교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대담을 나눴다.
두 사람은 신비주의라는 특수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기도 하다.
사제간이면서 신구학자로 만난 두 사람은
오늘날 종교계가 보여주고 있는 여걸 가지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해부하고
종교계가 바로 서고 옳게 가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종교와 종교인이 함께 심층종교와 종교인으로 성장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다시 태어남’이고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심층종교란 표층종교에 대비되는 것으로
표층종교란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원리주의적인 종교를 말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와 자기 것을 중심에 세우고 남과 남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전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종교행태를 가리킨다.
*****
종교적 발달 과정은 ‘작은 나’가 죽고 ‘더 큰 세계관을 지닌 나’로 확장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죽음과 재탄생을 거치면서 심층적인 체험을 통해 이타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교 전통의 경전이 말하는 것들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서로 사랑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며, 이타적인 인간이 되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만나게 됩니다.
-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중에서, 42쪽
‘하나만 아는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는 말과
‘더러운 물은 버려도 아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종교는 체험이지 설명이 아니다’라는 말과
‘불교가 있어서 기독교의 심층을 바로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의 말과
‘절대적 확신은 무지한 자의 특권’이라는 말 들을 읽는 동안
종교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들을 깎고 다듬어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자리에서 오강남 교수에게 들었던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깊은 곳에서는 서로 통할 수 있다’는 말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떠올랐다.
A라는 사람이 알고 있는 자기 종교가 표피적인 것이고
그가 알고 있는 다른 종교가 표피적인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또 B라는 사람이 자기 종교에 대해 표피적으로 알고 있고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다른 종교가 표피적인 것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A와 B는 서로 표피적인 앎을 내세워 시비를 벌이고 있는 셈인 것이다.
겸손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내가 내게 맞는 종교를 선택한 것처럼
다른 누구도 그 자신에게 맞는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각자가 서로의 종교 안에서 바른 가르침을 좇아 바르게 사는 것이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말하는 데 종교의 본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느리게 내 걸음으로 가도 되고
남보다 조금 늦게 이뤄도 된다.
거듭해서 새로 나기 위해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위해
종교 안에 머무는 모든 이의 모든 시간이 즐거울 수 있기 바란다.
더불어 나날이 새로 나고 거듭 나고 새사람 참사람이 될 수 있기 바란다.
안 해도 좋을 우스운 옛이야기 한 토막 덧붙인다.
한 달 전까지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던 여자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나서 생판 모르는 아이처럼 눈도 마주쳐주지 않더니
옛날 함께 뛰놀았던 운동장에서 남녀학생들이 함께 모인 어느 날,
아직 어린 아이들이 남녀로 나뉘어 한 판 제대로 언쟁을 벌였다.
발단은 영어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남자중학교에서 ‘is’를 ‘이스’로 발음한다 배웠고
여자들은 여학교 선생님에게서 그 발음을 ‘이즈’로 배웠던 것인데
우리는 배운 바에 따라 서로의 확신을 굽히려 하지 않았고
‘우리 것이 맞고 너희 것은 틀렸다’면서 상대를 싸잡아 눈 아래로 깔아보며 싸웠다.
처음부터 승자가 있을 수 없는 싸움이었다.
지금은 만나면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싸우기는커녕 서로 배꼽을 잡고 웃는다.
빈배님! 안녕하셔요.
아무리 깊이 들어가고 멀리 간것 같아도 계속간 끝은 항상 그자리라는것을 알면 이제 지구에서의 깨달음은 긑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