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

by 빈배 오 강 남 posted May 25, 2011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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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셋째 손자가 태어났는데, 아기 부모들이 고른 영어 이름이 도마(Thomas)입니다.

도마라는 이름을 잘 지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은 한국 이름은 지언(志彦)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이지만 도마복음에 나오는 도마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가장 잘

간취한 제자입니다.  두 주 후에 나올 제 책에 들어있는 도마 편을 여기에 옮겨 옵니다.

그에게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도마복음에서는 이 복음이 '비밀의 말씀'이므로

들을 귀가 있는 이들, 준비된 이들만 들으라고 합니다.  이 게시판에 드나드는 분들은 준비된 분들이라

생각하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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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마St. Thomas

-깨달음을 가르친 스승으로 예수를 소개한 『도마복음』의 기록자

"여러분 자신을 깨달아 아십시오"

 

도마는 지금까지 살펴본 ‘인류의 스승’ 중에서 조금은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최근까지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특별히 존경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성경에 포함된 복음서들에 보면 그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다는 것 이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요한복음』에서는 세 번씩이나 도마를 믿음이 없는 제자,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한 제자로 묘사하고 있기까지 하다.(『요한복음』11장 16절, 14장 5절, 20장 24절)『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그의 이야기를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다 아는 이야기이므로 생략)

 

이렇게 수모를 당하던 도마가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 중 한 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인도로 건너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는 전설 때문도 아니고, 또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성인으로 추대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의 가르침 중 가장 깊은 차원의 가르침을 취하여 그것을 『도마복음』이라는 이름의 복음서로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도마복음』이란 지금의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복음서들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지금 성경에 포함된 4복음서 이외에 여러 가지 복음서들이 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해 이런 복음서들 중 오로지 4개의 복음서만이 그리스도교 정경에 포함되고 다른 것들은 폐기 처분당했다. 이렇게 폐기 처분당한 복음서들 중 일부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라는 마을 부근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나그함마디 문서 뭉치들 속에는 모두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쌍둥이’를 의미하는 그의 이름 때문에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가 전하는 ‘비밀의’ 메시지가 놀랍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은 “살아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들”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도마가 간취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예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상식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의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가장 깊은 차원의 진리를 찾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꿰뚫어볼 수 있는 ‘비밀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하신 말씀 중에서 표층 혹은 현교적 차원이 아니라, 정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심층 혹은 비교적秘敎的 차원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이야기이다.

 

『도마복음』이 전하는 비밀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도마복음』은 성경에 포함된 복음서들과 달리 기적, 예언의 성취,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종말, 최후 심판,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대신 내 속에 있는 신성, 참나를 아는 ‘그노시스gnōsis’ ‘깨달음’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노시스는 프라즈나prajňā, 반야般若, 통찰, 꿰뚫어봄, 직관과 같은 계열의 말이기도 하다. 『도마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는 ‘나를 믿으라’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깨달으라’ ‘깨치라’고 타이른다.

 

『도마복음』의 한 절을 인용해보자. 제3절에 보면 “여러분 자신을 깨달아 아십시오. 그러면 남도 여러분을 알 것이고, 여러분도 자신이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라고 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 유명한 ‘그노시 세아우톤’이다. 알아야 할 것, 깨쳐야 할 것 중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바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사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는 사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 속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 ‘얼나’에 다름 아니라人乃天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진주’ 같은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도마복음』에는 도마 자신에 관해서 재미있는,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13절에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말해보라고 했다. 먼저 베드로라는 제자가 “선생님은 의로운 메신저와 같습니다”라고 했다. 마태가 그다음으로 ‘지혜로운 철인’과 같다고 했다. 도마가 마지막으로 “선생님, 제 입으로는 당신이 누구와 같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가 도마를 향해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 자네는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했네” 하는 말을 하고 그를 데리고 물러나 그에게 무언가 세 가지를 말해주었다고 한다.

도마가 자기 동료들에게 돌아오자 동료들은 그에게 “예수님이 자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도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 중 하나라도 자네들한테 말하면 자네들은 돌을 들어 나를 칠 것이고, 돌에서 불이 나와 자네들을 삼킬 것일세” 하는 대답을 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이 이야기가 지금의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공관복음서에도 나온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여기 『도마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공관복음서에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베드로의 고백만 있을 뿐 ‘도마의 침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선불교『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사에 머물며 9년간의 면벽面壁 참선을 끝낸 뒤 그곳을 떠나려고 하면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각각 그 동안 깨달은 바를 말해보라 했다. 한 제자가 나와서 뭐라고 하자, 달마는 “너는 내 살갗을 얻었구나” 한다. 다음 제자가 나와 또 뭐라고 하자, “너는 내 살을 얻었구나” 한다. 또 다른 제자가 나와 뭐라고 하자, “너는 내 뼈를 얻었구나” 한다. 드디어 그의 수제자 혜가慧可가 나와 스승에게 경건하게 절을 올린 다음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달마는 그를 보고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구나” 했다. 깨달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르면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 『도마복음』에서도 도마가 그가 깨친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침묵을 통해 웅변적으로 말한 것이 아닐까?

 

예수가 도마에게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중국의 고전 『장자』를 살펴보자. 공자의 제자 안회가 공자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말로 자신의 수행이 깊어지는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공자는 거기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안회가 자기는 좌망坐忘, 즉 앉아서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하자 공자는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 하고 묻는다. 안회가 모든 앎을 몰아내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자 공자는 안회를 보고 “청컨대 나도 그대 뒤를 따르게 하라”고 부탁한다.

 

예수가 도마에게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라고 한 말도 이런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깊은 경지에 이른 도마, 여기 표현대로 예수가 주는 물을 마시고 완전히 ‘취한’ 도마에게, 예수는 더 이상 선생님일 필요가 없고, 깨달음에 있어서 이제 둘은 동격임을, 그의 이름 그대로 ‘쌍둥이’임을 선언한 셈이다. 도마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기에 예수는 그를 데리고 나가 그에게만 특별한 비법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가 도마를 따로 불러 일러주었다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무엇, 심지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공분을 일으키는 엄청나고 혼란스러운 무엇이었음에 틀림없다. 궁극 진리란 상식의 세계, 당연히 여겨지는 세계를 뛰어넘는 역설逆說의 논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도덕경』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다”(제41장)라고 했다. 진리를 듣고 돌로 쳐 죽이려는 것과 크게 웃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진리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무엇이라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처럼 도마는 『도마복음』에서 제자들 중 가장 위대한 제자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마를 특별히 ‘인류의 스승’의 반열에까지 올리는 것은 그가 전해주는 『도마복음』이 그리스도교는 주로 현교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심층적 기별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학자는 1945년 『도마복음』의 발견이 주는 정신사적 충격이 같은 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에 버금가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필자가 『도마복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잃어버리거나 등한시되던 심층적 가르침을 되살리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준 그가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1)

 

1)『도마복음』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자가 최근에 펴낸 『또 다른 예수: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도마복음 풀이』(예담, 2009)이나 김용옥 지음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2, 3 』(통나무, 2010)을 참고할 수 있다.

 

참고: 도마복음을 영지주의 복음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도마복음서에 '영지주의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여 널리 알린 프린스턴대학교 일레인 페이즐즈나

하버드의 캐런 킹 같은 학자들은 이제 도마복음에 그런 명칭을 붙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합니다.  영지주의도 여러 가지인데, 도마복음이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나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주후 2세기 경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하던 영지주의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에서는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나타났다고

공언합니다.   영지주의는 나쁘다고 정해놓고 무엇이나 영지주의다 하고 딱지를 붙이는 일은 일종의 매카시즘이라 할 수 있기에 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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