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울의 도마복음 이야기 중에서 <더러운 것은 똥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다> 올립니다.

by 나는 나다 posted Jun 02, 2011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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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86) 더러운 것은 똥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다

 

밥(食)과 말(言)

 

제14장

1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禁食)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自招)하리라. 2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定罪)되리라. 3 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害惡)을 끼치리라. 4 너희가 어느 땅에 가든지, 한 시골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病者)를 고쳐주어라. 5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지난주에 소개된, 당시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예수의 신랄한 메시지는 1)금식 2)기도 3)구제, 3주제에 한정된 것이었다.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도마복음이 기독교라는 제도적 틀로 규정할 수 있기 이전 비제도권의 사회운동으로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제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면, 예수는 자기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선업(善業)을 쌓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좌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선업의 축적이 하늘나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임재는 점진적 축적이 아닌 세속적 가치의 단절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업의 축적은 필연코 위선을 불러일으킨다. 하늘나라의 임재는 메타노이아, 그러니까 생각의 전환, 의식의 혁명이다.

제6장에서 제기된 제자들의 질문은 상기의 금식·기도·구제 3주제 이외로 한 질문이 더 있었다: “음식금기는 무엇을 지켜야 하오리이까?”

유대인이 지금까지도 코셔(kosher)라는 형태로 지키고 있는 까다로운 제식적 음식금기(Diet)의 질문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4절부터는 제4주제인 음식금기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4절부터 갑자기 예수운동의 초기 전파상황을 전하는 방랑하는 카리스마들(itinerants)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제3절과 제4절 사이에는 문맥의 흐름상 어떤 깊은 단절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도마복음 연구자들이 이 장은 세 개의 단절된 파편이 합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이 세 개의 파편은 모두 공관복음서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Ⅱ는 마태·누가에 공통된 큐복음서에 속하는 자료이다(나의 책 『큐복음서』, p.153).

예수운동이란 예수의 천국운동을 전파하는 제자들(12제자에 한정되지 않는 숙련된 동조자들)의 운동이다. 이 제자들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예수천국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방랑하며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한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지니지 말라. 여행을 위하여 지갑이나, 배낭이나, 샌들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여벌의 속옷이나, 지팡이도 가져오지 말라.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Q29). 지팡이나 신발조차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무소유를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여기 도마복음 14:4의 “어느 땅에 가든지”라는 말에서 “땅”은 “나라”를 의미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분봉된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고, 독립국 형태의 폴리스들이 각기 영역(region, land)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수운동의 참가자들은 이 광범한 팔레스타인 영역들을 끊임없이 무소유의 에토스를 지니고 유랑했다.

그런데 예수운동이 잘 먹히는 곳은 대도회지가 아니라 조그만 시골동네들이었다. 그래서 여기 4절은 “한 시골동네를 거닐게 될 때에”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활동영역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언급이다.

3절과 4절 사이의 단절은 사상적으로도 모순을 일으킨다. 즉 3절에서는 “구제”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4절부터 나타나는 유랑하는 전도자들(The wandering missionaries)은 결국 동네 사람들의 구제나 자선에 의존하여 밥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쉽게 해결된다. 예수운동가들은 결코 구제나 자선에 의존하여 밥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쳐준다.” 나족의(裸足醫)처럼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도마복음의 소박한 한 구절이 마태에서는 다음과 같이 과장되어 나타난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자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그 동네에 유익한 것을 던져주고 공동식사를 통하여 천국의 임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크로쌍은 말한다: “이러한 공동식사야말로 남과 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이방인과 유대인의 모든 차별과 위계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혁명적 행위였다. 이런 공동식사야말로 어떤 문명사회에서든지 그 제식적 율법을 위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예수운동의 도전이 있었다.”(HJ. 263).

따라서 이러한 공동식사에 제공되는 음식에는 “금기”라는 것이 일절 존재할 수가 없다. 코셔 따위의 까다로운 제식적 음식 가림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되게 만드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허례허식이다. 역사적 예수에게 있어서 율법이야말로 천국의 반대개념이었다. 율법은 차별이요 저주요 의혹이요 질투이다. 천국은 하나됨이요 생명이요 도움이요 사랑이다. 그래서 말한다. “시골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면, 그들이 대접하는 음식을 그대로 먹으라.”

여기 “영접”은 결코 구제나 자선이 아니다. 즉 예수운동가들은 그러한 구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영접하지 않는다면 떠날 뿐이다. 굶어야 한다. 영접하면 주어지는 음식을 가림 없이 먹는다. 이것은 원시불교의 초기승단의 계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걸식을 하되 주는 대로만 받는다. 주는 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7가호 이상을 돌지 말라 등등.

영접받는 대로 가림 없이 먹는다. 왜냐?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이 구절도 마가·마태와 비교해 보면 도마의 구절이 훨씬 오리지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마에서는 더럽히다(to defile)의 목적이 제자들 자신이 되어 있다. 그런데 마가·마태에서는 타인이 되어 있다. 의미의 강렬함이 희석되고 목회자 자신의 반성을 타인의 문제로 외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먹은 것은 항문으로 다 빠져나가고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라는 구질구질한 해설을 첨가하고 있다. 이미 심신이원론적인 헬레니즘의 철학적 논설이 복음서기자들에 의하여 가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그것이 예수 자신의 말인 것처럼. 결국 도마 14장은 네 가지 종교적 행위에 관하여 연속성을 지니는 가장 오리지널한 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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