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 1

by 김원일 posted Jun 02, 2011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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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23 / 주현절 셋째 주일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 1

사도행전 2:43-47

곽건용 목사

오늘날 종교는 왜 번성할까요?

 

“내가 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라는 제목의 설교는 앞으로 두 주, 또는 세 주에 걸쳐서 진행될 시리즈 설교입니다. 오늘은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얘기를 할 터이고 다음 주일부터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얘기로 들어갑니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시리라 믿고 있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가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을 것임을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는데 그 근거는 과거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면 미래에도 그런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19세기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의 종말이 곧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세기 말이 되면 흔히 세상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이고 심지어 세상에 종말이 오리라는 예언이 유행하곤 했지만 19세기 말은 다른 때와는 달리 특별하긴 했습니다. 종교의 종말 예언은 그런 특별한 면들 중 하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들 눈에 종교는 사람들의 환상이고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사람들의 집착에 불과했습니다. 종교는 사람에게 눈곱만큼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만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머지않은 미래에 사람들은 종교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종교는 저절로 소멸하리라고 봤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물론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들의 예언대로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백 년 이상이 지났지만 종교는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종교는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종교는 숨을 멈추기 직전에 놓여있지 않고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번창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오늘날 종교가 번창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할 지경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 전성시대는 종교와 무관한 사람들의 눈에만 기현상(奇現象)이 아닙니다.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 눈에도 이 현상이 기이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사정이 왜 이렇게 됐는지, 무엇이 종교를 오늘날처럼 대유행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19세기의 종교와 21세기의 종교는 같지 않습니다. 종교는 세상이 변함에 따라서 변해왔고 적응해왔습니다. 19세기 종교 소멸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가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고 적응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생존해온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말입니다.

 

종교가 변화하고 적응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적응하는 일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적응하지 않으면 사멸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므로 모든 생명체는 변화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소멸하리라는 예언의 근거 중에는 사람들이 종교가 환상이요 착각이요 신기루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리라는 예측 이외에도, 종교는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하고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사람의 계몽된 정신 안에 종교의 자리는 있을 수 없을 뿐더러 고정된 교리 중심의 종교가 변화에 적응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봤던 것입니다.

 

종교가 ‘살아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1백여 년의 역사는 종교소멸론자들의 예언이 틀렸음을 보여줍니다. 종교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번창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가히 종교의 전성시대, 또는 종교 같기도 하고 종교 아닌 것 같기도 한 유사(類似)종교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합니다. 왜 사정이 이렇게 됐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종교는 계몽된 시대에도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요? 본회퍼의 말을 빌면 ‘성인이 된 세계’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 종교는 융성하고 있습니까?

 

가능한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저는 두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첫째는 계몽된 정신 속에서도 여전히 종교의 자리가 있더라는 대답입니다. 종교란 단순히 미개한 정신이 추구하는 미신이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의존하고 그 신의 힘을 빌려 소원을 이루려는 욕망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하는 일이라고 여겼지요.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과거에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점점 신의 입지가 줄어들었지요. 종교가 소멸하리라는 예언도 이런 사실과 관계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부분의 일들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사람의 삶에는 여전히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존재하더란 겁니다. 지식의 문제와는 구별되는 ‘의미’의 문제도 여전히 존재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계몽된 정신 안에도 그것만의 자리를 갖고 있는 독특한 정신세계요 정신활동임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사람의 생에는 이성과 합리만 갖고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여전히 종교가 필요하며 따라서 성인이 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종교가 갖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삶에는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종교가 그것들을 다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람의 삶에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게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없애려 하지 말고 불편하더라도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도 종교가 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종교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종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얘기입니다.

 

종교가 ‘번성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두 번째 설명은, 종교가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서 기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변화해왔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보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너무 변화와 적응을 잘 해서 번성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세상보다 앞서서 세상의 변화를 선도한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대를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그것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종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어느 생명체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변화에 대한 놀라운 적응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종교의 소멸이 예언되었던 19세기의 그리스도교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다른지만 생각해봐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니, 1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와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보면 종교의 놀라운 적응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느낌이 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적응 능력 때문에 종교는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지금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종교도 다른 생명체처럼 최고의 과제가 살아남는 일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과연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좋게만 봐도 되겠습니까?

 

종교는 절로 생겨난 생명체가 아닙니다. 종교는 누군가가 목적과 의지를 갖고 만들어낸 생명체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종교심’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유대교나 회교 같은 구체적인 사회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들은 목적과 의지를 갖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누군가’는 예수나 석가모니 부처나 모세나 마호멧 같은 개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종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시조(始祖)가 중요하긴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종교를 만들어낸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태어난 종교라는 생명체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종교는 그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과제인 생명체입니다. 이를 그리스도교로에만 국한해서 얘기하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가고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남고 번성하는 것이 존재 이유와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란 얘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기가 죽어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 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요 교회입니다.

 

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모든 면을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모세는 자기가 죽어야 할 때와 죽어야 할 장소를 제대로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었고 백성들의 불평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는 끝이 나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바라보이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모세가 그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어 했습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은 그의 전 생애의 목표였습니다. 아마 사십 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땅을 멀리 바라다보면서 깨달았습니다. ! 저 땅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여기까지가 내 한계구나! 성경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지만 이 인식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두부 자르듯 구별하겠습니까! ‘여기가 내 한계로구나!’ 하는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면서 동시에 모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온 그 자신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도 모세처럼 자기가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살아남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교회가 번성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죽는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천군과 천사를 동원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자들을 무찌르는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신 나사렛 예수의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음과 같습니다.

 

이 설교는 앞으로 두 주일동안 계속됩니다. 다음 주일에 할 얘기를 미리 맛보여주는 시를 한 편 읽고 오늘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게 전부입니다. 아주 짧은 시지요. 이 짧은 시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절창으로 일컬어지고 널리 불린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밑줄은 퍼온 자가 한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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