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하여 깊이 생각 해보곤 했으나 그럴수록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의 고난이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상의 고통보다 더 심했던 것 같이 생각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고 하는데 그 고통은 바로 달린 것 보다 더욱 심하지 않을까? 물론 십자가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신 자체가 큰 희생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 이시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더 쉽게 감당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말하면 보통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특권, 즉 능력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실이 고통 중에 예수님께 큰 위안과 격려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침내 십자가의 참 뜻을 좀더 밝히 이해 하였을 때 나는 나의 무지함에 대해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예수님의 고통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분의 죽음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보다 더 가혹한 것 이었다.
성경상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 째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죽음, 곧 성경이 말하는 “잠”이고 (요
성경은 말하기를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고 했다 (이사야 53:6 공동번역). 그런데 죄악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 놓는다 (이사야 59:2). 하나님과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영혼은 그의 모든 안정감을 잃어 버린 채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또 그 영혼은 상상을 초월하는 암흑과 절망감에 싸이게 되고 결국은 압도적인 죄책감에 억눌려 그 생명이 분쇄되어 버린다. 이것은 전혀 한 가닥의 소망도 없는 죽음, 곧 하나님과의 영원한 갈라짐, 빛, 기쁨, 생명등과의 영원한 굿바이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맛보신 쓰디쓴 절망과 멸망의잔, 죄의 삯인 둘째 사망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쌀 가마 메어지듯 그 분의 어깨에 메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 안에 친히 지셨다 (벧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경험은 쓰디쓴 것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아직 그 잔의 제일 쓴 마지막 부분 까지는 마시지 않으셨다. 평생 동안 그 분은 아버지의 받아 주심과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 아래 사셨다. 비록 지금은 아버지께서 얼굴을 가리우셨으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부활의 소망을 완전히 잃지는 않으셨다. 회개 하는 강도에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
그러나 곧 상황은 달라질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만 하셨다. 그 분의 마지막 고난에는 부활에 대한 모든 소망이 완전히 가리워 져야만 했다. 만일 그 마지막 고통의 시간 중에 티끌만큼이나마 부활의 소망이 주님을 지탱 시켰으면, 그 분은 그 분량만큼 모든 죄인을 위하여 둘째 사망을 맛 보지 아니한 것이 되고 또 그 액수만큼 모든 죄인들의 죄 값을 지불 하지 않은 셈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복음은 사기가 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이제 구주께서는 그 쓴 절망의 잔 밑바닥까지 모두 비워야만 하셨다. 모든 사단의 무리들은 동맹하여 우리 구주의 영혼을 그 누구도 건너보지 못한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태 27:40).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 하실지라” (마태 27:43). 제사장들과 교사들이 넘치는 자신감으로 예수님을 조롱한 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저주 받으셨음을 성경으로부터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
이젠 예수님께선 아버지의 임재하시는 빚에서 완전히 끊어졌음을 느끼셨다. “그는 하나님의 화해하시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최상의 고민의 시간에 거룩하신 얼굴을 구세주에게서 돌리심은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 고민이 매우 컸으므로 그의 육체적 고통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시대의 소망 p753) 천연계 마저도 이 두려운 장면을 보기를 거절했다.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으며, 자비롭게도 초인간적인 고통으로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버린 우리 주님의 얼굴을 가리워주었다. 갈바리를 덮은 찰 흑 같은 암흑 속에선 주님의 심히 상한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울부짖는듯한 괴로운 신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마가
이 무서운 때에 “그가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도 그에게 주어진바 되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그 희생을 가납하셨다는 것도 그 에게 말해진바 되지 않았다.” “구세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다” (시대의 소망 p753). 이 지옥의 고통 중에서 모든 소망은 녹아 없어져 버렸지만 그의 사랑만은 지옥의 불도 녹이지 못한다. 둘째 사망의 깊은 골짜기 조차 나를 찾는 주님의 강렬한 사랑을 막지 못한다. 예수께선 자신이 사느냐, 나를 살리느냐 의 기로에 서있을 때 “그는 자신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나를 구원하시기로 결정 하신다. (시대의 소망 p 693) 이것이 바로 둘째 사망의 늪보다 더욱 더 깊은, 지옥의 고통보다 더욱 더 강한 주님의 사랑이다!!!
( 1 ) 육체의 고통
베드로가 거꾸로 달려서 주님보더 고통이 큰 게 아니올시다
주님 보다 더한 고통은 없습니다
( 2 ) 온 인류 죄짐의 고통
주님께서는 육체의 고통도 고통이지마
그보다 더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지신 고통을 당하였나니
한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하여 평생 느끼는 죄책감, 후회감, 절망감,.....도 크거늘
온 인류의 죄의 고통을 다 지셨으니 얼마나 ......그래서 심장이 터지신 것입니다
( 3 ) 아버지께 버림 받는 고통
게다가 죄짐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이 아버지께 버림 받은 고통이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