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봉군 보다도 불쌍한 재림교인들(고아, 노숙자를 바로 알고 동정하기)

by 최종오 posted Jun 15, 2011 Likes 0 Replies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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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봉군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동안 울지도 울먹이지도 않았다.

3세 때 고아원에 맡겨진 후, 그의 생애는 정말 처절했을 텐데.

그 기구한 과거사를 이야기 하는데 놀라울 만큼 담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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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럼 몇몇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그는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일까?

최군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마치 부모가 생존해있는 유복한 가정의 자녀가 방송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연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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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최군의 말을 믿는다.

독자 중에는 내가 최군의 말을 믿는다는 이 말을 대수롭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 내가 그에 대해서 쓰는 이 글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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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국외의 여러 싸이트에서 최군에 대한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연역적 사고방식에서 그와 그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 것들뿐이었다.

여기 민초스다의 몇 글 쓰는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뭔가 답답함이 마음을 억눌렀다.

물론 난 그들의 진심을 오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군에 관련한 일을 듣고, 보고, 읽다가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부득불 이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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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엔 최군과 그에 관련된 일에 대하여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낸 귀납적 설명이 담길 것이다.

어딘가 이런 종류의 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난 문서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표해 사명감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그 세계의 전도자(?)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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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만 6세 때부터 불량어린이들(?)과 학교를 땡땡이(무단결석)를 치면서 성장을 했다.

그 이후로 국민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제외하곤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어린나이에도 오늘날 신도림역 근방에서 신문도 돌렸고 6학년 때는 가출을 하여 문래동 법원단지에서 구두닦이 찍쇠(?)도 하다가 붙들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드디어 만 15세에 가출에 성공(?)을 하여 21세까지 장기적인 노숙자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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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의 세계도 참 다양한 종류와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그 많은 얘길 여기서 다 할 순 없고 하여튼 성인이 되어서 노숙자가 된 사람들은 또 최성봉군을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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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머리 어린아이였던 나도 최성봉군처럼 껌팔이, 구두닦이,... 뭐 별의별 일을 다 하고 살았다.

시골 무슨 전기다마(전구) 공장에 잡혀가 매 맞아가며 일한 적도 있다.

그곳은 가출 소년들을 잡아다 노동력 착취를 하며 반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지금도 친구 두 명과 새벽에 슬리퍼 차림으로 그곳을 탈출해 130킬로미터를 걸어갔던 생각이 난다.

잡히면 맞아 죽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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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뭐 이거는 본론이 아니고...

17살인가 어떻게 청량리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대부분 고아들이었고 나처럼 가출한 아이들도 꽤 많았다.

우리는 봄에서 가을까지는 청량리 야채시장에서 지냈다.

밤에는 시장 콘크리트 바닥에서 축축한 이불을 덮고 노숙을 했다.

주변에서는 생선, 야채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정상인(?)이 되어 그곳을 간 후에야 그 냄새가 얼마나 역겹고 지독한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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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친구 중에 판쵸라는 아이가 있었다.

걔 말로는 자긴 18살이라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척은 했지만 사실 그 아이는 호적도 없고, 아니 한마디로 대한민국에 그런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 걸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이도 정확하지가 않다.

부모도, 형제도, 나이도, 이름도,...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내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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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아이들은 빨리 빨리 죽는다.

그리고 죽어도 뭐 이렇다 할 게 없다.

나보다 4살 많은 어떤 형도 21세에 폐렴으로 시장바닥에서 죽었는데 뭐 그 시체도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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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들은 보고 싶어도 어떻게 찾을 길이 없다.

판쵸, 점박이형, 양아치 형, 태기 형, 빨대,... 아마 대부분 죽었을 거다.

너무 더럽고 불결한데서 살았으니깐...

나만 어떻게 요행히 빠져나와 재림교 목사까지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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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친구 판쵸는 우는 걸 못 봤다.

슬퍼하는 것도 못 봤다.

불행해 하는 것도 못 봤다.

아니,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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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내 친구가 비닐(Plastic) 봉지에 밥을 얻어서 먹고는 바닥에 드러누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 배불러. 이젠 사장도 안 부럽다.”

배를 연신 두드린다.

그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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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아이는 서글프게 운다.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에 홀로 된 경우일 때 그렇다.

한 8, 9세 이후에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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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봉군이 3세 때 고아원에 맡겨졌다고 했다.

그 나이라면 부모 잃은 서러움이나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만한 밑천이 그의 기억창고에 남아있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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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을 기억하는 고아와 그렇지 않은 고아와는 천지차이가 있다.

맞아서 울 때도 그걸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울음 속에는 보호자의 품을 그리워하는 서글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후자는 아니다.

그냥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단순한 울음일 뿐 그 외의 다른 의미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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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최군의 비디오를 다시 한 번 보면 새로운 느낌이 들 거다.

"나의 이 모습을 돌아가신 어머님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나의 형제들...”

울먹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음직도 한데...

물론 그런 세계에 대한 부러움은 있다.

하지만 그런 세계에 대한 정서는 없다.

잠재의식은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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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노숙 중독에 걸려있다.

어쩌다 운이 좋아 부자 집에 양자로 가도 이내 나온다.

가식세계의 거추장스러움이 그렇게 만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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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아는 부자 집 자녀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부모가 있는 고아(?)들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부모의 집착과 위선에 질려버린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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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는 서류가 없는 세상.

돌봐야 될 가족이 없는 곳.

책임의 굴레에 묶여 살지 않아도 되는 곳...

아무데서나 잘 수 있고(서울역 화장실 스팀(?)난로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 쪼그리고 앉아 기대어 있으면 겨울밤 추위를 피해 잠들 수 있었는데...),

새벽마다 전국에서 실려 오는 산해진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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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노숙 친구들은 자신의 세상에 대한 경험과 느낌은 있지만 그걸 글로 표현을 못한다.

노숙자들이나 고아들의 경험이 없이 곱게 자란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아 글을 쓴다.

그들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는 잘 쓴다.

하지만 우리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도 글을 안다고 수려한 수식어를 동원해 우리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

그런데 어딘가 좀 아니라는 걸 나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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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의 것이 아닌 자신들의 오감과 육감으로 느낀 것을 우리에게 대입시켜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우리에겐 심하지 않은 냄새, 우리가 즐기는 노숙생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자신들의 관념으로 변형을 시켜 우리 자신들을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연역적인 사고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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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식인들이 우리들의 세상에 이상한 소리를 하면 내가 똑같이 다 반박할 거다.

나도 그동안 글 쓰는 법을 좀 배웠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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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경제인,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이 웬만큼 유명한 사람의 것이 아니면 이젠 주목받지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노숙자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혹 있다면 그들은 진정한 노숙자가 아니다.

소유의 맛을 알고 또 그것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사람들, 이 사람들은 형편상 우리의 세계로 흘러들어 와도 결코 우리와 하나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만의 준거집단을 따로 소유하고 늘 그곳에 그들의 마음을 두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꿈이 실현 불가능할 때 생명을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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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봉의 과거가 불행했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불쌍하게 보고 눈물짓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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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른다.

그가 부러워했을 소유의 세계라는 곳이 얼마나 큰 불행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곳이라는 것을...

그의 상품화가 성공을 한다면 그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질 거다.

그런 것에 도취되어 있을 어느 날, 자신에게 영혼이 사라졌음을 느끼겠지.

그가 얻을 것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바닥까지 퍼주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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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세계에서도 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존재한다.

난 지덕체에 대한 온갖 지식이 난무하는 이곳에 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노숙인들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유치함이 이곳에 편만함을 느꼈다.

‘B사감과 러브레터’처럼 정말 웃기는 일인데도 우습지가 않다.

최성봉군을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한 눈물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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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때 전도를 조금 해본 관계로 몇 사람에게 알려진 적이 있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달콤한 유혹이 왔었다.

“이번에 어떻게 해주면 어떻게 해주겠다.”

사실 이런 말들은 토끼에게 말만 잘 들으면 청부 대가로 반청바지를 입혀주겠다고 약속해주는 것과 같이 우스운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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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 사람들은 지고지선한 자리에 앉아서도 그런 행동을 하고 살까?

노숙자만도 못하게...

“그렇게 하면 재미없을 텐데...”

이런 말들이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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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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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봉군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들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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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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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회의 엄청난 행사 속에 아사(餓死)해가는 변두리의 교인들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이 사람들이야말로 최성봉군보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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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헌신한 재물을 한 군데에 모으면 몇 사람은 그럴듯한 행세를 할 수 있는 양이 된다.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벌이 꿀을 모으듯 일하는 교인들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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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들에게 진정한 노숙자 예수님을 주고 싶다.

그분은 부주의한 작가들의 연역적 논리가 아닌 인간의 경험과 심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경험으로 아신다.

성육신의 신비...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인간 중에 가장 낮은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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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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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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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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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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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손만이라도 그분이 가신 길을 가야하지 않을까?

혹 평신도가 안 가면 지도자만이라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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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이 혼란스럽다.

환경을 보지 말아야 그 길을 갈 수 있다.

오직 말씀만이 나의 지남(指南), 교회지남(敎會指南)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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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최성봉군 때문에 운 사람들은 다시 울기를 바란다.

진짜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다시 울어야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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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애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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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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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노숙자 예수님을 정말 정말 사랑한다.

나도 예수님처럼 노숙자가 될 거다.

나는 될 수 있다.

세상이 제 멋대로 만들어낸 가치, 돈과 명예, 권력,... 이런 것들 욕심 안 낼 수 있다.

부모, 형제, 친척 다 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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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까지 못 버리는 게 몇 있다.

사랑하는 승리엄마, 승리, 수민이...

이들이 내게 이렇게 큰 짐이 될 줄 알았다면 절대 소유하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도 제자들보고 짐이라고 하시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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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눈은 깊은 우수를 띠고 폭풍에 시달리는 귀한 짐을 실은 배를 좇으셨으니 이는 이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대의 소망,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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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짐들은 KBS, MBC, SBS와 그 외 각종 포탈(?)사이트들을 너무 좋아하니 세상의 빛 되기는 애시당초(?) 틀린 거 같고...

그런데도 이들에게 사랑의 노예로 잡혀버렸으니...

내 유일한 이 재산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

오늘도 세상은 이들을 볼모로 나의 자유를 억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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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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