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을 넘어

by 빈배 posted Jun 19, 2011 Likes 0 Replie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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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무실님과 이야기하다가 등장한 위 디오니시우스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아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런 경지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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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위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약 460∼520)

-침묵·비움을 가르쳤던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

"감각과 지성의 역할, 감각과 지성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뒤로 하라"

 

앞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신비 사상을 서양 신학자들에게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4~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러나 5~6세기경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가명의 시리아 승려가 등장하여 플로티노스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아름답게 결합한 신학서들을 저술하고 이것들이 9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방에 널리 읽히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이 12세기 이후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저자를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긴 이름 대신에 보통 ‘위僞디오니시우스’라 부른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때 몇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라고 했다.

 

전통에 의하면 그가 아테네의 첫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쓰였으리라 여겨지는 위의 책들을 쓴 저자가 1세기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진짜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 ‘위僞’라는 말을 붙이게 된 것이다. 아무튼 바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개종했다는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라는 가명 덕택으로 그의 책에 더욱 큰 무게가 실리고, 그것으로 더욱 크게 주목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그냥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디오니시우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신의 신비성을 그처럼 강조하는 저자가 스스로 신비의 장막에 싸여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남긴 『신비신학Mystical Theology』 『신의 이름Divine Names』 『천상의 위계Celestial Hierarchy』 『교회의 위계Ecclesiastical Hierarchy』 등 네 권의 책과 약간의 편지서들은 그리스도교 신비 전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겨우 5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책인 『신비신학』은 다른 어느 신학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학의 양대 기둥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13세기의 토머스 아퀴나스도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에 주석을 붙였고,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비주의 사상가로 여겨지는 13~14세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그 외에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자들 등 모두가 그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

 

디오니시우스는 궁극 실재 혹은 신성Goodhead에 대해 논할 때 그리스어 ‘hyper’라는 접두사를 많이 쓴다. ‘너머’ ‘위에’ ‘이상以上’ 등 초월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궁극 실재 혹은 신성은 ‘지성 너머hypernous․above intellect’, ‘존재 이상hyperousia․above being’, ‘신 너머hypertheotetos․above deity’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보통의 존재와 차원을 달리한 절대적인 무엇이므로, 인간의 일상적인 감성이나 지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무명無名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이런 절대적인 실재에 대해 일단 뭐라고 말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무엇일 수 없다. 『도덕경』 첫 줄에 나오는 것처럼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뜻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신비신학’에서 “신은 보편적 원인으로서 우주의 모든 긍정적 속성을 구유具有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신은 그런 것들이 없는 빔의 상태다. 그는 이 모든 속성들이 적용될 수 없는 초월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범주라도 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궁극 실재에 대해 그래도 이야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역설의 논리, 상징적 언어로나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나가르주나의 ‘공空․ sunyata’ 사상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본다.

 

<이성은 그분에게 이를 수도 없고 그분에게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분을 알 수도 없다. (……) 그분에게는 긍정도 부정도 적용될 수가 없다. (……) 그분은 모든 사물의 완전하고 유일한 원인으로서 모든 긍정도 초월하고 동시에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그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부정도 초월한다.(『신비신학』 5장)>

 

절대적인 실재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을 서양의 신학 전통에서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apophatic theology’이라고 하는데, ‘부정’이라는 말 때문에 이런 신학을 나쁘게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정의 신학이라 하여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디오니시우스는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라는 것을 인지하는 한 생명, 지혜, 선함, 능력, 사랑 등의 아름답고 긍정적인 속성을 신에게 붙여도 좋다고 했다. 이럴 경우 그것은 이른바 ‘긍정의 신학cataphatic theology’이 된다. 마치 인도 베단타 철학에서 절대적 브라흐만은 모든 속성을 초월하는 ‘무속성의 브라흐만Nirguna Brahman’이지만, 상징으로서 인격, 주님 됨 등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 ‘선한 속성의 브라흐만Saguna Brahman’으로 섬겨도 좋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도 절대적 신의 무한성과 위대성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디오니시우스가 ‘그분’이니 ‘신’이니 하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마저도 ‘상징적symbolic’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실 디오니시우스는 인격성을 함의하는 ‘신’이나 ‘그분’이라는 말보다 비인격적 표현인 ‘절대자Thearchy’라는 말을 선호했다. 『신비신학』에서 처음 성부, 성자, 성령을 부르는 형식적인 기도문을 제외하고는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신’이라는 말 자체도 그 절대적인 궁극 실재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디오니시우스는 힌두교 베단타 철학에서 라마누자보다 샹카라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샹카라에게 있어서 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neti-neti’라 한다.

 

참고로 한 가지 덧붙이면,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자 폴 틸리히도 ‘신 너머의 신the God above God’이나 ‘신의 상징으로서의 신God as a symbol of God’이라는 말을 쓰고, 신을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바탕the Ground of all being이라 하는데, 스스로 그것이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라 인정하고 있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신관은 신을 ‘초월이면서 동시에 내재’라는 양면성으로 파악하는 이른바 ‘범재신론적 신관’이라 부른다.

 

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절대자에 대한 상징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을 상징으로 여기지 않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대단한 지식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는 한 결코 그 상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실재를 보지 못하고 만다고 하였다. 마치 대리석을 쪼아 조각을 할 때 그 속에 내재하던 형상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도록 하던 모든 장애물을 쪼아 없애고 나면 거기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조각상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우리가 그 절대적 실재를 참으로 알고, 나아가 그것과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적인 묵상 수행을 할 때, 감각과 지성의 역할, 그리고 감각과 지성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뒤로 하라. 그러면 알지 않음을 통해 모든 존재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분과의 연합을 향해 도달할 수 있는 한도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네 자신이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절대적이고 순수한 무욕의 상태에 이를 때,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너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신의 광명을 향해 올라가게 될 것이다.(『신비신학』 1장)>

 

디오니시우스는 이어서 우리가 그 광명 너머에 있는 ‘어둠’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침묵과 무지’에 이른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이처럼 모든 잡동사니 지식을 다 비워버릴 때, 완전한 무지에 이를 때, 혹은 황홀에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숭고한 기관을 통해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 일자一者와 합일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그 일자와 하나 됨’은 곧, 나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디오니시우스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이 그처럼 강조하는 ‘신화神化․deification’라는 것으로서, 그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종의 목표라고 한다. 물론 이런 목표에 이르는 것은 나 자신이나 세상사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극복한 상태,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상태, 자의식이 없어진 경지, 류영모의 용어를 빌리면 '몸나' '제나'에서 벗어나 '얼나'로 솟아난 경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디오니시우스는 신으로 나아가는 세 가지 단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는데, 그것은 자기를 정화purification하는 단계로 시작하여, 빛을 보는 조명illumination의 단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궁극 실재와 하나 되는 합일union의 단계에 이르러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이 세 단계 이론이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던 ‘신비의 길mystical path’에서 거쳐야 할 세 단계설의 원조인 셈이다.

 

앞에서 플로티노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언급했지만,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와 아름답게 종합한 디오니시우스의 신학 사상을 살펴보면서도, 그것이 인도 베단타 학파의 철학이나 『‘도덕경』의 가르침 등 동양의 종교 사상을 연상케 한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신비 사상, 심층 종교가 서양 전통에도 면면히 흘러왔지만, 그 동안 절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을 모르거나 등한시하거나 백안시했다. 그러다가 현재 불교 등 동양 사상과 접한 신학자들이나 의식 있는 평신도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동서양 대화를 위해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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